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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오소카라] 노을의 저편(완)

노을의 저편_2

주탄동자 오소마츠 X 사변카라


    시간은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게 흘러갔다. 매일매일 주탄동자가 내어주는 식사는 맛있었고,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뒹굴 거리기만 하며 보내는 삶은 원래 일상과 큰 다를 바 없었기에. 숲 속으로 주탄동자와 함께 산책을 나가기도 하였고, 달이 밝게 뜬 밤이면 툇마루에 앉아 밤새 수다를 떨기도 하였다. 그 모든 시간 내내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면, 주탄동자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있든, 허리에 팔을 두르든, 카라마츠가 어디 훌쩍 날아가 버릴까 두렵기라도 한 듯이 늘 곁에서 붙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카라마츠는 그런 접촉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지나치게 안일했고, 그의 뇌는 한 주제에만 집중할 수 있었음으로. 오늘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지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가끔씩 불쑥불쑥 찾아오는 가족들에 대한 씁쓸한 기억들은 다른 잡념들을 그의 마음에서 몰아내기에 충분했다. 가족들은 그를 걱정하고 있을까. 그를 찾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노을 진 기억은 이내 모든 걱정을 부정해 버렸지만 말이다. 걱정 할 리가 없지 않는가.

    문제를 굳이 하나 꼽자면, 그 모든 시간들이 지나치게 평화로웠다는 것이다. 며칠이나 흘렀을까? 딱히 날을 세지 않았던 카라마츠는 하늘을 보며 질문했다. 여름 햇살이 피부를 따갑게 파고들어 발갛게 자국을 남겼다. 잘 하면 이번 여름 동안에 피부를 멋지게 태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하릴없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무엇을 하지? 산책을 나가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낮잠이나 자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것을 매일매일 반복하려니 슬슬 지루해지려는 참이었다. 인터넷도, 전기도 없는 깊은 산 속에서 도를 닦는 심정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주탄동자와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 따분함은 별개였다. 핸드폰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까. 어차피 충전할 방법도 없으니 오래가지 못하겠지만.

    적당히 마루에 드러누워 뒤척이던 카라마츠는 문득 든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단 하루, 하루만 도시로 내려가 이것저것 구경할 수 있다면 이 따분함도 좀 가실 것 같았다. 오랜만에 카라마츠 걸즈와 이야기도 좀 하고, 잡지라던가 책이라도 몇 권사면 심심할 때마다 읽기 좋겠지. 서둘러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지갑을 꺼내 수중의 돈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많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충분한 양의 돈이 아직 보관되어 있음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몸을 일으켰다. 당장 신발을 신고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곳에 처음 온 날, 주탄동자가 일러줬던 말이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도망치려는 거야?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걸. 잘못하면 숲에서 길 잃고 굶어 죽는다구?

    그래, 말도 없이 훌쩍 떠난다면 주탄동자가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아직 굶어 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도시로 나들이를 나가자는 허락도 받고, 길 안내도 받을 겸, 카라마츠는 주탄동자를 찾아 안방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는 때로 이렇게 햇빛이 강한 날이면, 시원한 방 안으로 들어가 낮잠 자는 것을 좋아했다. 혹시 주탄동자도 함께 가고 싶어 한다면, 같이 구경을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옷을 어떻게 해야겠지만. 그의 옷이 제법 멋지다고 카라마츠는 내심 생각했지만, 그대로 돌아다닌다면 너무 눈에 띌 게 지나치게 뻔했다.

    "주탄동자? 주탄동자! 카라마츠 boy~?"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주탄동자는, 카라마츠의 예상대로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가 깰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런다면 나들이는 내일쯤에야 나갈 수 있을 게 뻔했고, 카라마츠는 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 한 번 불붙은 욕망은 쉬이 꺼지지 못하고 어서 이루어지길 울부짖었다. 그래서 카라마츠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주탄동자의 어깨를 잡고 약하게 흔들었다. 주탄동자? 일어나 봐라, 주탄동자! 내가 아주 멋진 아이디어를 냈는데…….

    "……아오안돈?"

    걷히지 않은 꿈의 장막으로 인하여 흐리멍덩한 눈이 물끄러미 카라마츠를 바라본다. 그의 뺨을 쓰다듬을 듯 오른손을 뻗더니, 이내 그의 목을 감싸고서 아래로 강하게 잡아당긴다. 카라마츠는 어느새 시야 안에 가득 찬 주탄동자의 얼굴에 발버둥 칠 생각도 못하고 멀뚱히 그를 바라봤다. 물컹한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입 안을 훑고선, 이내 더 깊게 파고든다. 혀와 혀를 얽으며 나는 소리가 지나치게 야살스러워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문득, 카라마츠는 주탄동자의 왼손이 어느새 자신의 옷을 들추고 허리춤을 매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강하게 주탄동자의 혀를 깨물었다. 악, 하는 비명이 고요했던 방을 울렸고 주탄동자는 전보다 더 또렷한 눈으로 카라마차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닦으니 전보다 확연히 부은 입술이 손끝 아래 느껴진다. 그제야 머리는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천천히 분석하기 시작했고, 끝났을 무렵에 카라마츠는 차라리 분석하지 못했으면, 이라 빌고 있었다. 온 몸의 피가 얼굴에 몰린 듯 양 뺨이 뜨끈했고 뇌는 오류라도 난 듯이 한 단어만을 머릿속에서 반복하고 있었다. 키스, 키스. 그와 주탄동자가, 키스를. 카라마츠에게는 첫 키스였다. 애초에 연인이나, 여자 친구와는 거리가 먼 그였으니까. 새삼스럽게, 자신의 전생이라던 아오안돈과 주탄동자과 연인이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하였다. 주탄동자가 무엇을 바라며 그를 데려왔는지도. 순식간에, 온 몸의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아, 저기, 그……. 미안해. 잠결에, 무심코……."

    "아, 아니다. 괜찮다. 잠결에 그럴 수도 있지. 응,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저 남자의 연인이 될 수 있는가?

    카라마츠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입맞춤을 하고, 사랑한다 속삭이고, 그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가? 연인이나, 여자 친구와는 거리가 먼 그였다. 연인 흉내 따위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랑하는 척이라던가, 싫지 않은 척이라던가. 카라마츠는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정성스럽게 차려주는 밥들과 다정한 시선, 그리고 따뜻한 손길. 사랑받는 건 나쁘지 않았다. 사랑받는 삶은 좋았다. 그를 사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에게 받는 사랑만큼은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아니라 그의 사랑을 위해 연인이 된다면, 입맞춤도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카라마츠는 애초부터 똑똑하다고는 할 수 없는 두뇌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세상은 간단했다. 그를 사랑해주고, 사랑을 받는다. 사랑받는 삶을 사랑한다. 그것이면, 되지 않을까?

     "정말 미안해. 억지로 할 생각은 없었는데! 너랑 아오안돈이랑 정말 닮았으니까 말이야. 으응……."

    "괜찮다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무릎이라도 꿇고 빌 것 같은 태도에 이내 카라마츠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목을 매만졌다. 지금 당장은 강요할 생각이 없더라도, 분명 언젠가는……. 흐려지는 생각을 굳이 쫒지 않고 놓아준다. 그때가 온다면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주제도 돌릴 겸, 원래 온 목적도 달성할 겸 카라마츠는 산 밖으로 잠시만 나갔다 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침 조금 전의 사건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주탄동자라면 조금 더 너그럽게 이 제안을 받아들여줄 수도 있었다. 행운이라면 행운이지. 그러나 말을 늘어놓으면 늘어놓을수록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지는 주탄동자의 입가에 카라마츠는 불허를 직감했다.

    "그래, 뭐……. 가고 싶다면야. 하루쯤은 괜찮겠지."

    예상외의 대답에 카라마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말인가, 주탄동자! 지금 갈 수 있나? 반짝거리는 청년의 눈빛이 지나치게 눈부시기라도 한 듯, 주탄동자는 한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가, 이내 그에게 잠시 말을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내었다. 얌전한 아이처럼 곧바로 입을 다무는 카라마츠의 모습에 입가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다.

    "단, 조건이 있어. 첫째는 나랑 같이 갈 것. 둘째는 산 밖에 있는 내내 내 곁에 머물 것. 셋째는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올 것. 그래도 괜찮아?"

    "응응, 괜찮다! 아주 좋다! 아, 그러면 주탄동자, 그 옷은 어떻게 할 건가?"

    "아, 옷? 확실히~ 이 모습으로 돌아다닐 순 없겠지."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탄동자의 머리에서 뿔이 사라졌다. 눈가의 화장도 지워지고, 사극에서나 나올 법했던 옷은 어느새 카라마츠와 비슷한 모양의 후드와 청바지로 바뀌어져 있었다.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소름끼칠 정도로 새빨간 그의 눈동자 정도였을까. 천천히 주탄동자를 뜯어보던 카라마츠는, 새삼스럽게 그가 얼마나 오소마츠와 닮았는지를 한 번 더 깨달았다. 둘을 나란히 세워둔다면, 구분을 못 할지도 몰랐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시선이 싫지만은 않은 듯, 주탄동자는 새 옷을 자랑하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런 소소한 행동에서까지,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떠올렸다.

    "쨘~! 도깨비의 둔갑술이라구. 멋지지 않아? 입이 안 다물어지지? 완전 대단하지?"

    "정말 오소마츠와 닮았군."

    의도치 않게 튀어나와버린 속마음에 카라마츠는 뒤늦게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나 주탄동자는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가만히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자신은 주탄동자가 기분 나빠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제야 떠오른 의아함에 카라마츠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도로 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났을 때도, 오소마츠를 불렀지? 오소마츠가 누구야?"

    "하항, 어쩌다 보니 내 가족 이야기를 못 해줬군. 오소마츠는 내 바로 위의 형이다! 참고로 내 아래는 동생이 넷이나 더 있다고. 여섯 쌍둥이라고! 운명적이지 않나?"

    "흐음, 그렇구나. 여섯 쌍둥이라고?"

    "그렇다제! 더 말해주자면 내 바로 아래 동생의 이름은-"

    "그거, 내가 오소마츠랑 닮은 게 아니야."

    "으응~?"

    주탄동자의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을 때, 카라마츠는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저 텅 빈 무표정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붉은 달을 닮은 두 눈이 서늘한 방의 그림자 속에서 어둡게 빛을 흘렸다.

    "오소마츠가 너랑 닮았고, 너는 나랑 닮았으니까. 나랑 오소마츠가 닮은 건 당연한 거지."

    하지만 그거와는 달라. 당신과 오소마츠는 닮았어. 외모가 아니라……. 끓어오르는 말들을 억지로 삼키고서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탄동자의 태도는 이 주제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냈고, 카라마츠는 굳이 그를 거스를 생각이 없었다. 자, 그럼 이제 갈까? 주탄동자의 내밀어진 손을 마주 잡고서,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신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내내 둘 사이를 오가는 말은 없이, 공기는 적막하기만 했다. 평소에 말이 많던 주탄동자는 이상하게 앞만 바라봤고, 카라마츠는 조금 전에 나눴던 대화를 곰곰이 짚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왜 주탄동자와 자신이 닮았는가? 카라마츠는 주탄동자가 내뱉은 마지막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전생이 아오안돈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아오안돈도 주탄동자와 닮았었다는 말이 되려나. 그렇다면 아오안돈은 어째서 주탄동자와 닮았는가. 둘은 의형제라고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주탄동자는 오늘까지 카라마츠에게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오소마츠가 누군지 몰랐으니. 여태껏 가족 이야기를 꺼낼 이유도, 계기도 없었으니 그럴 만하였지만 왜인지 섭섭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보통은 궁금해 하지 않나? 아니면 정말로 그저 이야기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주탄동자를 탓할 정당한 이유라도 얻으려는 듯, 카라마츠는 자신이 주탄동자에 대해 아는 걸 최대한 떠올리려 했으나 그럴 수 없음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가 아오안돈과 연인 사이었다는 것, 그리고 술을 좋아한다는 것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던 것이다.

    무관심은 쌍방이었다.

♣ ♧ ♣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 사람으로 가득한 거리, 녹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잿빛 건물들이 왜 이리 반갑게 보였을까? 신사는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와 나뭇잎들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평화로운 고요가 공기를 맴돌았다. 그러나 이곳은 생기가, 삶이, 그리고 소음이 넘쳐 적막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오는 길의 서먹함도 어느새 잊어버리고서 카라마츠는 어디부터 갈까,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역시 잡지를 사려면 서점에 가는 게 좋을 텐데. 그래도 나온 김에, 신상 가죽 재킷이 있는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가족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전화라도……. 시간과 돈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자꾸만 욕심이 생겨 카라마츠의 발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서성이기만 하였다. 그런 카라마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탄동자는, 먼저 나서서 그의 손을 잡아끌며 길을 이끌기 시작했다.

    "잡지던가, 무슨 책 산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면 서점이지?"

    "어? 으, 응. 그나저나 정말 빠르게 왔군! 이렇게 도시와 가까이에 있는 줄은 몰랐는데."

    "도깨비길을 썼으니까. 나랑만 있으면 지구 반대편까지 순식간에 걸어갈 수 있다구, 카라마츠? 대단하지?"

    능숙하게 인파를 헤치고 서점을 향해 걸어가는 주탄동자의 등만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라마츠는, 보폭을 넓히며 그와 발걸음을 나란히 하였다. 건물 위로 솟아오른 전광판에서 시간과 날짜가 밝게 깜박였다. 한 달 만이구나, 스치듯 생각하며 그는 아예 길 안내를 주탄동자에게 맡기고서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건물도, 지리도, 시 이름도 죄다 낯선 것들뿐이었다. 이 곳이 어디이든 아카츠카 구에서 꽤 먼 장소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우연이라도 가족과 여기에서 마주칠 일은 없겠구나, 싶어져 입 안에 아쉬움인지 안도일지 모를 씁쓸함이 차올랐다.

    "그나저나 주탄동자는 길을 매우 잘 아는군! 자주 오는가, 여기?"

    "별로? 그냥, 너를 찾아다닐 때 하도 돌아다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애초에 난 이런 곳 별로 안 좋아하고."

    "아? 도시라던가, 그런 곳 별로 안 좋아하는 건가?"

    "아니, 난 인간이 싫어. 넌 괜찮지만."

    그래서 산 아래로 나가자고 했을 때 표정이 좋지 못했던 것인가. 카라마츠가 입을 열어 물어볼 수 있기 전에, 그들은 서점에 다다랐다. 딸랑, 주탄동자가 서점 문을 밀어 여니 위에서 작은 종소리가 명쾌하게 울렸다. 시원한 에어컨의 공기가 그들을 맞이하였고, 그 청량감에 카라마츠는 스스로가 담고 있는 줄도 몰랐던 숨을 내뱉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그 사이에 책을 고르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서 주탄동자는 잠시 카라마츠의 곁을 떠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서점은 다행이도 카라마츠가 즐겨 읽던 잡지를 팔고 있었고, 카라마츠는 그 잡지와 심심할 때 읽을 만화책도 몇몇 집어 들었다. 이만큼 사면 안 되어도 또 한 달은 어떻게 버티겠지, 싶을 만큼 고르니 그 무게가 제법 묵직했다. 그렇게 계산대로 향하려는 순간, 책 한 권이 카라마츠의 눈길을 끌었다. 원래 만화책 외의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였지만,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책을 집어 들고서 살피기 시작했다.

    요괴대백과, 라고 깔끔하게 흰 바탕에 제목이 쓰인 책은 꽤 아담한 크기였다. 속을 슥 훑어보니 여러 가지 삽화와 부연 설명들이 눈에 띄었고, 그는 목차 중에 주탄동자와 아오안돈이 있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카라마츠의 머릿속으로 주탄동자의 뿔과 뾰족한 송곳니가 떠올랐다. 익숙해져서 망각할 뿐, 주탄동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상기되었다. 이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던 카라마츠는 저 멀리서 주탄동자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서 재빠르게 책을 잡지들 아래에 숨기고 그대로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가 카라마츠의 곁에 다다랐을 때에, 카라마츠는 이미 책을 다 계산하고 봉투에 담은 뒤였다.

    "카라마츠, 벌써 책 다 산 거야?"

    "사나이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서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인다지……. 그야말로 빛의 속도를 가진 남자! 빛 같은 남자가 이 카라마츠가 아니겠나!"

    "아파! 완전 아파! 나 갈비뼈 부러진 것 같은데!"

    "에? 어째서……. 요괴마저도 고통 받게 하는 죄 많은 남자가 나인 건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카라마츠와 주탄동자는 그대로 서점을 나와 길거리로 향했다. 오후의 태양은 따갑게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쬐었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카라마츠의 손에 쥐여진 종이봉투는 묵직했다. 그 다음에는 어디에 갈래? 상냥하게 물어봐주는 주탄동자에 질문에 답하는 대신 카라마츠는 지갑 안에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기 바빴다. 서점에서의 지출이 생각보다 컸기 때문에 애초에 선택지는 그리 넓지 못하였다. 이 적은 돈을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카라마츠는 무언가를 기억한 듯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서점에서 잡지들을 구경하느라 잠시 까먹었던, 해야 할 일을.

    "주탄동자, 혹시 근처에 공중전화기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여기 온 김에, 가족에게 전화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들이 진심으로 걱정하던, 아니면 까먹고 있던 일단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전화라도 한 번 거는 것이 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내뱉은 질문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되돌아 왔을 때, 카라마츠는 할 말을 잃고서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한 편으로는 불만도 있었다.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이상한 반응으로 응답하는 주탄동자의 기분을 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무엇이 싫고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것을. 카라마츠가 깊게 파고들기 전에 자꾸만 교묘하게 주제를 돌리는 탓에 그러지도 못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 하루 종일 화를 냈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닌가? 도리어 억울함이 치밀기까지 하였다. 첫 키스를 빼앗긴 쪽이 누구인데. 그 대신 도시 나들이를 나오긴 했지만.

    "……카라마츠, 솔직하게 대답해봐. 나야, 가족이야?"

    "하아?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야 가족이야! 둘 중 하나만 선택해봐."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갑자기 왜 이렇게 구는 건가, 주탄동자."

    "모르겠다니, 너무한 거 아냐? 그거야, 그야……."

    그 이유라고 하면, 까지 나온 말이 목에 탁 걸려 막혔다. 더운 오후 햇살 때문인지, 주탄동자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여져 있었다. 말을 할 듯 말 듯, 씩씩거리기만 하다가 이내 결심을 한 듯 깊게 심호흡을 하였다. 뒤따라 기관차처럼 빠르게 튀어나온 말들에 카라마츠는 잠시 이해를 못하고 멀뚱히 눈만을 깜박여야 했다.

    "나는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너는 그게 아니어서 도시에 가고 싶어 하고! 나 보면서 오소마츠, 오소마츠 그러고! 그리고 이거 나, 나름……. 그거잖아! 데이트인가 뭔가! 그런데 가족에게 전화하겠다고 하면 넌 꼭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거 같고! 그런데 말하기엔 치졸한 것 같아서 대놓고 말도 못 하고!"

    "그래서, 질투했단 건가? 주탄동자."

    "질투 같은 거 안 했거든! 안 하거든! 천 년이나 먹었으면서 유치하게 그런 거 하겠냐!"

    "그러니까 왜 질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차피 난 네 곁에 계속 있을 거 아닌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모르고 그럴만한 돈도 이제 없었다. 애초에 돌아가 봤자 환대는 받지 못할 것이다. 가고 싶어 한다고 해도 주탄동자가 보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카라마츠는 주탄동자의 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를 통해 아오안돈을 보는 것이니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았는가? 왜 굳이 그의 생각에까지 신경을 쓰는 것인지, 카라마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카라마츠, 그 자체를 신경 쓴다는 것처럼. 우스운 생각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났다. 주탄동자를 바라보니 그도 어느새 기분이 풀린 듯 조금 전의 험상궂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든 아직도 화났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듯, 최선을 다해 삐진 표정을 지으려고 하였지만 입가가 자꾸만 씰룩였다. 그래도 그 사이에 띄엄띄엄, 그래도 전화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털어놓는 속마음에 카라마츠는 알았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 따윈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시끄러운 도심지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둘 사이에는 다시금 어색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한참 동안 시선만을 도륵, 도륵 굴리다가 이내 주탄동자는 헛기침을 하며 운을 떼었다.

    "그,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그, 네 형……. 오소마츠. 혹시 좋아했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

    "뭐, 좋아했었지. 형제로서. 늘 형제들을 잘 이끌고 여유 있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으니까."

    급격하게 다시 어두워지는 주탄동자의 표정에, 카라마츠는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동경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연애 감정의 의미로는 좋아하지 않았어."

    그래? 그럼 됐고. 한숨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만족한 듯 웃으며 가자, 라고 손을 내미는 주탄동자의 뒤로 여름 해가 내리쬐었다. 마치 후광 같다고, 그리고 곧 있으면 노을이 지겠군, 이라 생각하며 카라마츠는 그 손을 잡았다. 그 때까지 아직 얼마의 시간이 남았지만, 그 시간을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오겠거니, 싶었을 뿐이었다.

    손에 들린 종이봉투가 유난히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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