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치카라]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완)
[돈마피/돈히라]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 中
긔디
2019. 2. 3. 12:59
W. 치누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안쓰러운 마피아 씨?"
"아아... 완벽하게 패배해 버렸다. 반박의 여지도 없이."
이야, 안타깝기까지 하네 ― 라며,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 듯 태평한 미소만을 짓고 있는 남자를 카라마츠는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무례하고, 아이 같으며 충동적인 저 남자는 아카츠카 패밀리의 보스, 마츠노 오소마츠였다. 강렬한 색의 붉은 와이셔츠와 선명히 대비되는 검은 넥타이를 답답하다는 듯 느슨하게 푼 그는, 여전히 삐뚜름한 미소만을 지으며 제 곁에 서 있는 카라마츠를 올려다봤다. 애초에 이곳은 카라마츠의 호텔 방이었는데 어째서 저 남자가 당당히 침대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지는 몰랐지만, 어젯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카라마츠는 그런 소소한 것까지 신경 쓸 기력이 없었다. 어서 따뜻한 물속에서 언 몸을 녹이고 푹신한 침대에 묻혀 잠들고 싶을 뿐이었다. 이왕이면, 영원히.
문득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아카츠카 패밀리의 보스는 할 일도 없는 건가? 임시 동맹중이라고 해도, 다른 패밀리의 마피아의 침실에 이렇게 당당히 죽치고 앉아 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보스이든 뭐든, 그가 자신의 잠을 방해할 권리는 없었다. 눈치만 빠르고 글러먹은 저 인간이 남의 연애사정에 웬일로 먼저 도움을 권했을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다. 이유를 물어도 재밌어 보이니까, 라고 어물쩍 넘긴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어물쩍 넘긴 것이 아니라 그게 진심이었다. 오소마츠에게는 카라마츠의 상황이 그저 재밌는 일일연속극이나 영화 쯤 될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곳이 일본이 아니라 이탈리아였더라면, 앞 뒤 가리지 않고서 일단 총부터 쏴고 봤을 텐데. 하지만 이곳에서 소동을 일으키면 돈이 곤란해 할 테니까, 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카라마츠는 팔짱을 꼈다. 먹구름이 진 그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오소마츠는 아예 침대 위로 드러누우며 팔자 좋게 떠들기를 계속했다.
"총도 안 든 민간인에게 져버리다니, 마피아라는 직업 때려치워야 하는 거 아닌가? 보스, 카라마츄에게 완전 실망했음~!"
"훗, 사랑의 싸움이란 때로 그 무엇보다 자비 없고 잔혹한 것... 네가 무엇을 알겠나, stronzo."
"아, 그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욕이지? 분명 욕 한 거지?"
오소마츠의 투정을 무시하며 근처 소파에 몸을 풀썩, 맡겼다. 늘 지니고 다니는 권총을 찾아 몸을 더듬다가, 그제야 마츠노에게 덮어줬던 코트의 안주머니에 보관해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나중에 찾고 놀라면 안 될 텐데, 무엇보다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괜찮겠지, 무심하게 넘겨버리는 안일함은 오소마츠 못지않은 것이었다. 저절로 감기는 두 눈 사이의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카라마츠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오소마츠를 방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차라리 무시하고 바로 씻으러 갈까? 아카츠카 패밀리의 콘실리에리인 쵸로마츠에게 연락을 넣어볼까. 아니, 이만큼 시간이 흘렀는데도 안 오는 걸 보면 쵸로마츠도 이미 포기했다는 의미였다. 정말 눈을 딱 감고 물리적으로 쫓아내 버릴까. 정신적, 육체적 피곤이 중첩된 그의 사고 회로가 똑바로 돌아갈 리 없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가벼운 손길이 톡, 건드린다. 가늘게 눈을 뜨고 흐릿한 초점을 맞추니, 어느새 제 앞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오소마츠가 보였다.
"정 신경 쓰이면 이거라도 써 보지 그래? 토토코쨩에게서 특별히 받은 건데~ 커피에든, 밥에든 한 티스푼만 섞어버리면 몇 시간 후에 심장마비를 유발시킨다고 하더라구? 게다가 24시간이 지나면 몸에서 배출되어서 들킬 염려도 없음! 솔깃하지 않아?"
그가 검지와 엄지로 잡아 유혹하듯 카라마츠의 눈앞에서 흔들고 있는 것은 특이점이라곤 보이지 않는, 평범한 흰 가루가 든 플라스틱 봉투였다. 부엌에 놓는다면 베이킹파우더로 착각할 법 하고, 영화에서 나타난다면 마약이구나 넘길 법한, 어디에든 같아 붙이기만 한다면 그럴싸해 보이는. 필요 없어, 말을 뱉어내기도 전에 그 봉투는 오소마츠의 손을 떠나 카라마츠가 입은 셔츠의 앞주머니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쉿, 하는 시늉을 하는 오소마츠는 마치 비밀을 공유하는 아이처럼 신이 난 듯 보였다. 어서 이 비밀을 동네방네 떠들고 싶어서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한시라도 빨리 약속을 어기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자자, 사양하지 말고! 굳이 그 회사원 씨에게 쓰라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내킬 때 쓰라고. 조커를 소매 안에 하나쯤 넣어둬서 나쁜 거 없고 말이야."
사람의 속을 잘도 헤집어 놓고서 미련 없이 떠나간다. 카라마츠가 조금 전까지 했던 고민이 무색하도록 오소마츠는 가볍게 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약 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자, 분명 가벼워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묵직하게 손바닥에 눌어붙은 느낌이 든다. 기분 나빠,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려다가 움직임이 우뚝, 멈춘다. 한참 동안 망설이며 봉투를 손 안에서 쥐었다 폈다, 를 반복하다가 이내 찜찜한 표정을 지으면서 카라마츠는 그것을 도로 제 앞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모르니까, 라고 아무도 없는 방에게 변명하며. 오소마츠의 말대로, 혹시 모르니까.
급작스러운 피곤함이 몸을 덮친다. 갑자기 손가락을 까딱할 힘도 없어서, 카라마츠는 기어가듯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예상대로 베개는 푹신하고 매트리스는 소리도 없이 그의 몸을 집어 삼켰지만, 오소마츠가 누웠던 곳이 끈적끈적하게 그에게 달라붙는 것 같았다. 굳이 그 회사원 씨에게 쓰라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네가 내킨다면... 안쓰러운 마피아 씨, 사랑은 그 무엇보다 자비하고 잔혹한 거라며? 그런 거에 반칙 따위는 없다구. 승자랑 패자만이 있을 뿐이야.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카라마츠는 여전히 억지로 이치마츠의 마츠노의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이 없었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불의의 사고라면,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라면... 그렇게 속여 넘길 수 있다면. 카라마츠는 몸을 웅크리고서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안 돼, 생각하지 말자. 모든 걸 잊는 거야. 이치마츠와 마츠노의 관계도, 앞주머니에 안의 약 봉투도, 자신의 마음도, 삼켜지지 않는 실연도. 스스로를 끌어안고서 그는 수면 아래로 빠진다. 차라리 꿈에 익사하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 ♣ ♧
방 안에서 움직임이 잦아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오소마츠는 천천히 발을 옮겨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정말로 미련한 남자라고, 그는 생각한다. 깔끔하게 포기를 하던가, 상대방을 죽이던가 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할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체하는 카라마츠는 그 자신의 안일함이 초래한 희생양이리라. 입술을 둥글게 내밀고서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가벼우면서도 암울한 멜로리가 벽과 부딪혀 공기를 채운다. 그러나 역시나 오래 가지 못하고 노래는 뚝, 끊긴다.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이치마츠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피노 패밀리의 돈, 이치맛쨩 아니야? 카라마츠에게 가는 거야? 안 가는 게 좋을 텐데. 조금 전에 잠들었다구?"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험악해지는 모자 아래 표정을, 오소마츠는 흥미를 지니고서 관찰한다. 참으로 애매하다고 그는 느꼈다. 분명히 사랑과는 달랐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한 저 감정 덩어리를 무어라 단정지어야할지 도통 알아낼 수 없었다. 저렇게 밀어내는 척 여지를 주니 카라마츠가 포기를 못 하지, 싶기도 하였다. 하여간 잔인한 남자였다, 이치마츠는.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그렇게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으니 오소마츠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원래 이야기에서 제일 재미를 보는 것은 방관자였다. 캐릭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도록 가끔씩 방향을 제시할지언정 개입은 하지 않는 것이 그의 태도였다.
"...네 알바냐. 내 부하는 내가 알아서 관리하니까 신경 끄지 그래. 너는 왜 그 방향에서 나와?"
"보나마나 회사원 씨에 대해서 물어보러 가는 거지? 너무 집착이 심한 남자는 매력 없는데~."
회사원, 이라는 단어 하나에 마치 죽어버린 시체가 도로 살아난 듯 이치마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왜, 어떻게, 그리고 감히 제 사랑을 입에 담냐는 듯 경계와 짜증이 뒤섞인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오소마츠는 사람 좋게 웃기만 했다. 동맹을 맺으러 온 패밀리의 돈이 갑자기 귀국 날짜를 한 달 더 연기하고, 매일같이 어딘가로 사라진다면 조사 해보는 것이 예의 아니겠는가? 적어도 들키기 싫었으면 은밀하게 행동해야지, 길거리 한복판에서 꽃다발을 들고 구애한다는 건 들키고 싶어 날뛴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넉살 좋은 미소 대신 조소가 일순간 얼굴 위로 스쳐간다. 이내 이치마츠의 어깨를 툭, 토닥이고서 오소마츠는 느긋하게 제 가던 길을 마저 나아갔다.
"카라마츠에게 좀 잘해줘. 아니면 더 심하게 해줘도 좋겠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뛰쳐나오면 내가 주워서 언더보스로 삼아버리게~. 카라마츠같이 실력 좋은 부하를 굳이 카포레짐 같은 말단 간부로 두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인력 난리야, 인력 낭비."
그 이유야 명백했다. 너 따위는 곁에 오지도 못한다고 거리를 두는 것이었고, 그와 동시에 포기하지는 못할 정도로 가까이 둔 것뿐이었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으니까. 카라마츠에게 아주 조금의 관심만 지니고서 아주 조금만 유심히 관찰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푸른 시선의 끝이 언제나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그 시선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안의 담긴 낙심과 체념까지, 파도처럼 덮쳐와 흠뻑 적셔놓고 가버리겠지. 안타까운 사람이구나, 쓴 맛만을 입 안에 남기고서.
자신이 멀어짐에도 따라 울리지 않는 한 쌍의 발걸음에 귀를 기울이며, 오소마츠는 고개를 옅게 흔들었다. 이 녀석도, 저 녀석도 죄다 미련한 인간들뿐이었다. 그저 구경하는 그는 재밌으면 그만이었으니, 상관없었지만. 이 촌스러운 무대가 언제 막을 내릴지 상상하며, 남자는 아침 햇살 아래로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