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단편

[오소카라] La Fortuna!

긔디 2022. 9. 6. 07:47

보스 오소마츠 X 오너 카라마츠 오소카라CP

예전에(2020년에...) 쓴 글인데 이래저래 미루다가 이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 1.8만자입니다. 기네요.... 과거 글 마주할 용기는 없어서 읽어보진 않고 올립니다.

 


 

높은 천장에 고풍스럽게 매달린 조명. 잘 닦인 바닥은 검게 빛나고 시야에 담아지는 모든 것이 반짝거리나 결코 경박스럽지 않은 분위기. TV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들이 점잖은 정장들을 차려 입고서 누군가의 땀을, 눈물을, 삶을 쉽게도 건네고 아쉬움에 혀를 차는 곳. 마츠노 카라마츠가 운영하는 카지노는 그런 곳이었다. 그 어디를 가도 그의 카지노에 버금가는 장소는 찾기 힘드리라. 그만큼 그의 카지노, La Fortuna는 카라마츠의 자랑이자 사랑이었다. 그가 왕으로서 군림할 수 있는, 그의 휘하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빛나고, 바스러지는 곳! 오랜 시간을 투자해 일궈낸 그의 성인만큼 그는 아무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특히 VIP실에 드나들 수 있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카라마츠도 쉽게 막을 수 없는 불청객이 한 명 있었다. 덩치 큰 시커먼 장정들과 함께 들이닥쳐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지 않나, 원한다면 그 누구보다 큰 금액을 걸 수 있으면서 남의 테이블에 기웃거리기나 하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이었더라면 그저 쫓아냈으면 될 일이건만, 이 남자라면 그 후환이 더욱 골치 아플 것을 알았기에 손쉽게 그럴 수도 없었다. 오늘은 그의 개인실 에서 여유롭게 쉬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무거운 한숨을 내뱉고서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다. 그에게 소식을 전달해준 장본인인 쵸로마츠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진다. 밝은 청록색의 눈이 불만을 여실히 드러낸다.

 

"굳이 직접 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은데. 내가 대신 쫓아내줄까?"

 

"괜찮다, 쵸로마츠. 한두 번도 아니고. 언제 다녀왔는지도 모르게 빠르게 해결하고 돌아 와주지!"

 

카라마츠의 자신만만한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쵸로마츠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베스트만 걸치고 있던 몸 위로 정장의 웃옷과 긴 머플러가 걸쳐지고, 이내 부하가 정중히 들고 있던 페도라까지 머리에 씌우자 그는 자신이 완벽한 '오너'의 역할에 맞춰졌노라 느낀다. 시원하게 접혀지는 그의 눈초리는 호탕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속내를 적절히 감추고 여유로움을 진득하게 흘렸다. 속을 헤아릴 수 없는 포커페이스야말로 도박꾼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던가! 쵸로마츠의 어깨를 달래듯 가볍게 두드리며, 그는 신뢰가 담긴 눈빛을 건넨다. 내가 없는 동안 VIP룸 관리를 부탁한다, 치프. 그의 메시지를 받은 쵸로마츠는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너. 비록 깐깐하고 말도 많았지만 그만큼 꼼꼼하며 두뇌가 비상한 사람이 쵸로마츠였다. 상사는 몰라도 부하에 관한 인복은 참 많다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는 카지노의 홀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띵… 엘리베이터는 규칙적인 기계음을 내며 착실하게 하강한다. 카라마츠의 카지노는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1층에는 가볍게 돈을 굴려보려는 이들이, 2층에는 좀 더 큰 금액을 걸고 희희낙락하는 이들이. 3층은 VIP실이었으며 4층이 그의 개인실 이었다. 제아무리 카리스마 넘치고 유능한 남자라도 가끔씩은 혼자만의 휴식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띵…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한 번 더 감소했다. 그 남자 정도라면 비웃듯 쉽게 2층에 출입할 수 있었다. VIP층도 마음만 먹는다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거물인 주제에 굳이 1층에서 죽치고 앉아, 보란 듯이 자신을 기다리는 꼴이 밉상이었다. 결국 그 남자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 마는 스스로의 처지가 통탄스러웠으나,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라고 카라마츠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더 이상 그 바보 자식에게 휘말리지 않겠노라고.

 

띵! 유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짧은 복도를 지나치면 이내 넓은 카지노가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쉬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구석의 바, 출입구 근처의 환전소, 그리고 공기를 가득 채운 웃음소리와 탄식소리, 그리고 그 사이에 부유하는 대화들. 비어 있는 좌석이 없었고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 테이블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평소와는 다른 어색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힐끔거리는 시선들은 모두 한 명을 향했다. 슬롯머신에 앉아 과장된 움직임으로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남성은 돈을 잃을 때마다 큰 소리로 한탄을 하였다. 어차피 그 따위 돈이야 홧김에 길거리에 버려도 괜찮을 인간이면서, 늘 엄살만 심했다. 기껏 여기 와서 하는 것도 겨우 슬롯머신 따위라니. 여기가 길거리 도박장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느긋하던 발걸음이 어느새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남자를 감싸든 에워싼 장정의 사내들도 카라마츠를 보고선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도도한 유쾌함이 서려 있던 표정은 어느새 냉정한 짜증만이 가득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찬란한 샹들리에를 향해 추켜올려지더니, 이내 자신의 운명을 꿈에도 모르고 레버를 당기는 데에만 열중한 뒤통수를 단호하게 내려친다. 딱, 명쾌한 울림과 함께 손바닥이 머리통을 후려갈긴다. 악, 고통이 뒤섞인 경악도 함께 카지노에 울린다.

 

"누구야! 이게 뭔 짓이야!"

 

"너야말로 또 내 카지노에서 뭔 행패인가, 오소마츠."

 

구겨진 종이처럼 울상이 된 표정이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으나, 카라마츠에겐 어림도 없었다. 겨우 그 따위 표정으로 내가 마음이 약해질 줄 알고. 마피아의 보스라는 자가 어떻게 저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인지, 아마 카라마츠는 평생 알아낼 수 없으리라. 뒷머리를 문지르며 혹은 없는지 확인하던 오소마츠는 아랫입술이 턱에 닿을 듯이 비죽였다. 기껏 정돈한 머리카락이 무신경한 손가락 아래 흐트러졌다가, 가라앉는다.

 

"엄연히 따지면, 이 카지노는 네가 아니라 조직의-."

 

"내 카지노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오소마츠의 말을 끊는다. 모자의 챙 아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난다. "무슨 행패냐고 물었다."

 

"행패는… 무슨…."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좀 봐주는 눈치였는데. 철없는 아이를 쫓아내듯 귀찮은 한숨을 푹푹 내쉴망정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은 없었다. 방문 할 때마다 꼬박꼬박 손수 나와 주기도 했고. 물론, 카라마츠가 나오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않을 거라 떼를 쓰긴 했지만. 정말 싫었다면 억지로 끌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감히 조직의 보스를 끌어낼 간 큰 조직원이 어디 있겠냐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카라마츠가 갑작스럽게 태도를 달리 할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늘은 그렇게 큰 말썽도 안 피웠는데. 그냥 기계 중 하나에서 손맛 좀 보고 있었다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핑계거리를 찾아내던 오소마츠의 눈이 크게 뜨인다. 아, 혹시 그거 때문인가? 지난번에는 쫓겨나지기 직전에 카라마츠를 붙잡고서 입술에 가벼운 뽀뽀를 했었다. 키스도 아니고 정말 가벼운 입맞춤이었는데, 설마 그 쪼잔한 걸로 아직까지 화내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한두 번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자꾸만 쫓아내니 약 올랐다. 왜 오는지 정말 모르나 싶어 속상도 해서,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물론 잘한 행동은 아니었노라 인정한다. 그 때 쵸로마츠라도 있었으면 그대로 한 대 얻어맞았을 것이다. 카라마츠가 날린 주먹에 더해서 말이다. 그래도 걔는 나 때렸으니까 쌤쌤 아냐? 카라마츠는 아직도 굳이 입을 다물고 오소마츠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만, 오소마츠는 머릿속으로 이미 아무도 듣지 못할 변명들을 나불거리고 있었다. 점차 인내심이 닳아가던 카라마츠는 발로 바닥을 느리고 가볍게 탁, 탁 두드렸다.

 

"오소마츠?"

 

"어, 응? 뭐라고?"

 

멍한 오소마츠의 반응에 카라마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보나마나 또 딴 생각이나 하고 있던 거겠지. 속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더라도 그의 생각이 표정으로 공공연히 드러났다. 최소한 무표정이라도 유지하려는 노력이라도 보일 수 없나? 카라마츠는 유독 그에게 야박했고, 유독 그의 앞에서만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네 표정을 지나치게 잘 읽는 걸지도 모르겠네. 또 삼천포로 빠지려는 생각을 다시 붙잡은 건 다시금 카라마츠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뭘 하려고 왔나? 별 볼일이 없었다면 그만 나가주면 좋겠군."

 

"아, 그게 말이지…."

 

"그리고 이왕이면 다신 돌아오지 않았으면 한다."

 

"뭐?"

 

숨소리에서 옅은 떨림이 들린다. 두어 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던 카라마츠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정돈되고 또박또박한 어조는 꼭 그가 이 순간을 위해 수십 번 대본을 외고, 준비한 느낌을 풍겼다. 여실히 체감되는 냉정한 단호함에, 오소마츠는 쓸쓸함을 느낀다. 너무 차가워서 형아 얼어 죽어버릴 것 같은데. 입술이 오리주둥이 될 만큼 내밀어도 카라마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소용없었지, 이거.

 

"솔직히 마피아 조직원의 보스가 주기적으로 와서 물을 흩트려 놓으면 좋아할 도박꾼이 몇이나 있나? 오소마츠가 자꾸 오니까 손님들도 끊이지 않나. 매출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기나 하나?"

 

"그런 거 치곤 오늘 사람 꽤 많지 않아? 그리고 장부 관리는 쵸로마츠가 하는 거 다 아는데-."

 

"오소마츠. 대답."

 

아무리 재촉해도, 오소마츠는 차마 답을 내줄 수 없었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넘어간다고 해도 이번에는 카라마츠가 봐주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진심을 말할 수도 없었다. 네가 날 보러 와주지 않으니까, 내가 널 보러 온 거잖아. 내가 반갑지 않아? 날 보고 싶지 않았어? 나 혼자 이렇게 안달을 내는 걸까. 또 오소마츠가 입을 다물고 있자, 카라마츠는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할 말 없으면 역시-."

 

"이, 있어! 있거든!"

 

서둘러 주머니 안에 손을 찔러 넣자 묵직한 카드 더미가 느껴진다. 포커 카드보단 작지만 그것보다는 수가 많은, 쉽게 볼 수 없는 붉은 색의 카드들. 원래는 카라마츠가 재밌어 할 것 같단 생각에 가져왔는데, 이런 쓸모가 생길 줄이야. 침으로 메마른 입 안을 적시고서, 그는 한 쪽 눈썹을 높게 추켜세운 카라마츠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랑 내기하자."

 

"내기?"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나온다. 이제 와서? 지금, 굳이? 그러나 오소마츠는 꿋꿋이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응, 내기. 설마 카지노의 오너께서, 내기 하나를 하기 싫다고 빼는 건 아니겠지?"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굳이 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거다."

 

"내가 지면, 네가 원하는 데로 다시는 오지 않을게. 카지노 관련이라면 관여도 안 하고? 뭐, 너랑 쵸로마츠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고 있었지만."

 

오소마츠의 제안에 카라마츠는 자신의 턱을 감싸고 잠시 말이 없었다. 분명히 혹하는 제안일 것이다. 자신이 오지 말라고 백날 말해봤자 오소마츠가 무시하면 카라마츠는 그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가볍고 장난스러운 오소마츠라도 자신이 한 말은 언제나 지켰다. 뒷세계에서 말이란, 그 말을 내뱉은 자와 동일한 무게의 순금만큼 가치가 있었다. 신뢰할 수 없는 말 한 마디를 믿기에 그들의 목숨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오소마츠가 제안할 내기라면 분명 도박과 관련된 것일 터이고, 도박이라면 카지노의 오너인 그가 질 리가 없었다. 언제나 속없이 헤실 거리는 그의 속을 읽는 건 어려워도, 순수한 실력만으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카라마츠는 내기에 순응한다.

 

"좋다. 그러면 내 개인실로 갈까. VIP실에는 이미 손님들이 계셔서 말이다."

 

"VIP실에까지? 야, 너 요즘 손님 줄었다면서-."

 

"조용히 하지 않으면 곧바로 쫓아낼 줄 알아라."

 

곧바로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는 카라마츠를 오소마츠는 서둘러 뒤따라간다. 간단한 손짓으로 뒤따라오던 장정들을 물리고, 그들은 단 둘이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다. 정사각형 모양의 작은 감옥 안에서, 한 뼘도 안 되는 거리가 그들을 가른다. 꿋꿋이 시선을 앞에 고정시킨 카라마츠의 옆얼굴을 재차 눈으로 훑는다. 시원하게 올라가다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코, 눈 위로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긴 속눈썹, 말끔하게 관리 된 흰 피부. 예전에는 좀 더 장난스러운 면모도 있었는데. 넘치는 삶을 주체할 수 없듯이, 그저 모험을 떠나고 싶다는 듯 반짝이는 눈이 참 예뻤는데. 흘러넘치던 생기는 어느새 단단한 유리병 안에 담겨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제되며, 향기로운 와인처럼 더욱 감미로워지며, 그러나 아무도 감히 맛을 보지 못하게 꽉 닫힌 뚜껑 아래서.

 

시선을 돌려 엘리베이터의 문 위,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숫자를 바라본다.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카지노는 오소마츠의 제안이었다. 이번에는 카지노 쪽으로 사업 좀 늘려볼까 하는데~. 딱히 할 사람이 너밖에 없네, 카라마츠? 쵸로마츠도 보좌로 붙여줄 테니까 말이야, 잘 해봐?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카라마츠를 한 군데 붙잡아 두고 싶었다. 카지노라는 명목의 족쇄를 채운다면 좀 더 가까이 곁에 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얼마나 미숙하고 충동적인 생각이었던가. 족쇄가 되었어야 했던 카지노는 오히려 그들 사이를 막는 벽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애정을 지니고 신경 써 줄 주는 몰랐지. 차라리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후회가 되기도 하면서도 카지노를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뿌듯한 표정을 보다보면 역시 그래도, 좋은 결정이었노라 스스로를 도닥이게 되는 것이었다. 의도했던 쪽으로는 아니어도 카라마츠가 즐겁다면야 결국 괜찮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이리저리 날뛰던 카라마츠가 카지노를 운영하게 된 이후로 여러모로 안정된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오소마츠!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로 1층으로 내려갈 생각이라면 난 좋다만."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추억에 젖어 있었는데~."

 

타박하는 목소리에 미소로 대답한다. 개인실을 향해 앞서 가는 카라마츠를 냉큼 따라가며,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빤히 관찰한다.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더라? 보나마나 쵸로마츠가 오너로서의 체면이니 품격이니 잔소리를 쏟아 부은 후겠지. 셔츠 단추를 세 개씩 풀고 툭하면 일을 빼먹던 그가 대체 어떻게 저렇게 단정하고, 깔끔한 옷만 챙겨 입게 되었을까. 그의 시선을 느낀 카라마츠가 짧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오소마츠의 시선이 고집스럽게 카라마츠에게 달라붙자, 그는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나?"

 

"응? 아니, 뭐, 이것저것. 너에게 카지노 오너를 맡기기 전이라던가?"

 

"그때가 언제더라. 벌써 5년도 넘었다."

 

"벌써 그렇게 됐어? 시간 빠르네~. 그때는 우리 카라마츠, 좀 더 애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카지노를 맡겨뒀더니 어느새 이렇게 멀어져서 보스를 문전박대 하고 말이야? 보스, 슬프다구?"

 

"애초에 네가 환영 받을만한 손님인지를 먼저 생각해라,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잠시 입을 앙다물었다. 흰 치아가 촉촉하게 유지되어 부드러운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가, 이내 그 자국을 붉은 혀가 재빠르게 훔친다. 그는 자신이 이 말을 하면 후회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마츠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오소마츠에게 아무리 벽을 치려고 해도, 결국 그 문을 열고서 그를 끌어들이는 건 자기 자신이라고 카라마츠는 남몰래 탄식한다.

 

"그래도, 오기 전에 미리 연락을 주면 최소한 문전박대는 하지 않겠지."

 

"어, 진짜? 미리 연락하면 문 잠가 버릴까봐 안 했는데?"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아이처럼 신나하는 오소마츠가 선명히 보였다. 한 단계 높아진 목소리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말 카지노에는 놀고 싶어서 온 것뿐인가,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하긴, 슬쩍 일을 미루면 어떻게든 해결해주는 쵸로마츠와는 달리 토도마츠는 영리하게 책임을 회피하며 오소마츠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영악함이 있었다. 그런 토도마츠가 보좌관이라면 도망치고 싶을 만도 하지. 하지만 많고 많은 곳 중에서 왜 하필 자신의 카지노인 건지. 카라마츠는 옆에서 들려오는 수다를 무시하며 개인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쵸로마츠마저 VIP실을 관리하러 자리를 비웠기에, 그의 방은 텅 비어있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개인실이 자신의 방인 것 마냥 자연스럽게 의자에 안착했다. 카라마츠는 바로 앉는 대신 고급 와인과 두 개의 유리잔을 꺼내 탁자 위에 두었다. 내기를 할 거라면 도박을 할 게 분명했고, 도박을 할 거라면 맛있는 술과 하는 편이 좋았다. 쵸로마츠는 그가 술에 약하다며 잘 마시지 못하게 늘 잔소리 하였지만, 그건 '술을 마시며 여유롭게 도박을 하는 멋진 남자'에 대한 카라마츠의 로망을 깰 수 없었다. 오히려 쵸로마츠의 잔소리가 심해질수록 카라마츠는 자신의 술병들을 더 숨기는 데에만 능숙해졌다. 오랜만에 마시는 거니까 괜찮겠지. 천천히 마시면 지장 없이 포커이든, 블랙잭이든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와, 이것들 어디서 꺼낸 거야?"

 

"네 알바 아니다. 그래서, 나랑 내기를 하겠다고? 내가 이기면 내 카지노에 발을 들이지 않는 조건으로 말이다. 내기는 무엇으로 하겠나? 룰렛도 좋고 카드게임도 좋다. 포커를 할 거라면 이치마츠를 불러와서 딜러를 시키지."

 

"이치마츠는 굳이 안 불러도 돼. 아, 근데 무슨 게임을 할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

 

"그 정도는 오소마츠 마음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럼 난 이거!"

 

탁, 손바닥을 꼭 채우는 카드 더미가 그들 사이를 갈라놓은 유리 탁자 위에 올려놓아진다. 여태껏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카드들의 등장에 카라마츠의 얼굴은 당혹스러운 빛을 띠었다. 희고 붉고 검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카드들은 꼭 동화책과도 같았다. 이걸로 짝 맞추기라도 하자는 건가?

 

"너라도 이건 들어본 적 없을걸. 화투라고, 지난번에 내가 한국에 출장 갔을 때 보니 거기선 다들 이걸 하더라고? 너 가르쳐 주려고 애써 하는 방법도 다 외워 왔으니까 말이야."

 

포커, 블랙잭, 텍사스 홀뎀, 순전히 확률이라는 룰렛까지. 카라마츠는 그 무슨 도박이든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태어나서 오늘 처음 들어보는 도박이라면 영 말이 달랐다. 법칙도, 모양도, 그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카드 게임을 하라고? 새카만 두 눈이 카라마츠를 빤히 응시한다. 익살스러운 미소가 귀까지 걸린 오소마츠는, 태연히 검지로 자신의 코 아래를 훔쳤다. 그가 특히 기분 좋을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이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오너."

 

§§§

 

잘 다듬어진 눈썹이 좀 더 가파른 각도를 이루며 콧등을 중심으로 모아진다. 깊게 팬 주름이 말끔한 피부에 어지러운 낙서를 남긴다. 비죽 내밀어진 아랫입술에는 불만과 당혹스러움을 고스란히 표출하며 고집스러운 자기 표현을 한다. 자기 손 안에 쥐여진 패를 한참 동안 노려보던 푸른 시선이 이내 결심한 듯 하나를 뽑고 탁자 위로 던진다. 짝! 시원하게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화투 패를 두 장 집어들고서 새로운 한 장을 뽑아 빈 자리에 눕힌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에 어느새 부드러운 의기양양함이 물들며, 카라마츠는 자신의 몸을 소파에 편히 뉘였다. 페도라의 챙을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훑는 손끝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카지노의 오너는 그가 질 리가 없었다. 물론 처음 몇 판은 규칙들을 외우느라 여러 번 헤맸지만, 일단 하는 방법만 안다면 그가 평정하지 못하는 도박판이란 없었다. 이제 1점만 더 얻는다면 스톱을 부르고서 판을 끝낼 수 있었다. 판 위에 놓인 카드는 단 한 장밖에 없었다. 오소마츠가 짝 패를 지니고 있더라도 운이 좋아봤자 카드 두 장, 운이 나쁘면 뻑이 될 것이다. 한편, 카라마츠의 앞에는 그가 열심히 모아온 패들이 그의 앞에서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이제 오소마츠가 고집을 부리면서 판을 엎거나, 삼세판이라고 우길 일만 남았노라 카라마츠는 남몰래 웃음을 흘린다. 조금 이르지만 미리 축배라도 들까. 와인 병을 잔 위로 기울였으나 나오는 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세 판 쯤 전에 다 마셔버렸지. 카라마츠를 빤히 관찰하던 오소마츠는 한쪽 눈썹을 높게 추켜들더니 이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뽑을 패들을 골랐다.

 

"나, 흔들게. 그럼 나중에 이길 때 점수 두 배인 거, 기억하지?"

 

세 장의 카드를 보이며 미소 짓는 오소마츠를 바라보자, 카라마츠는 누군가 어깨 위로 찬물을 쏟은 듯한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술에 잔뜩 취한 그의 뇌는 그 이유를 정확히 꼽을 수가 없었다. 힐끔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자, 그는 자신의 직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따다닥, 세 장의 패가 홀로 놓인 패 위로 추락한다. 네 장을 탐욕스럽게 쥐고 자신의 앞에 나열하며, 오소마츠는 자신의 코 아래를 훔친다.

 

"그럼 카라마츠 패 한 장 가져갈게~. 아, 싹쓸이도 했으니까 한 장 더 맞나?"

 

어떻게 여기까서 와서 이럴 수가 있지? 정말 승리가 코앞이었는데. 카드를 정리하며 점수를 줄줄이 읊는 오소마츠의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져 갔다. 어디보자, 그러면 삼광에다가 고도리, 그리고 지금 카라마츠가 준 패 덕분에…. 아, 쌍피도 있었네! 아, 또…. 그래서, 점수를 다 합치면….

 

"아~ 머리 아파서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난 건 확실하네! 보스는 쫄보니까 말이야, 그만 스톱할래."

 

"뭐, 뭐? 아니, 그럴 수 없다! 이건 아직 연습 판이었다. 아직 족보를 다 외우지 못했단 말이다! 한 판 더!"

 

"지금 그 말이 딱 12번째야, 알지?"

 

날카로운 지적에 카라마츠는 차마 더 이상 말을 붙잡고 늘어지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 판은 정말 이길 것 같았는데! 차마 떨치지 못하는 아쉬움에 착잡한 시선을 장갑 낀 두 손으로 떨어트린다. 시커먼 손바닥 위에 붉은 화투는 불꽃처럼 선명했다. 12번이나 겨뤄서 12번이나 참패라니. 카지노의 오너인 그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처음 서너 번은, 아니, 후하게 쳐서 처음 10번쯤은 초보라서 그랬노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번이 넘어선 지금은, 아무리 자존심이 쎈 그라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확실한 패배였다.

 

왜 자신은 항상 지는 쪽이지?

 

"왜 늘 이런 식인가?"

 

갑작스럽게 억울함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지며 그의 이성을 푹 적신다. 사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전부터 차곡차곡 쌓여가던 서글픔이, 흘러넘치기 직전이었으나 자존심이라는 고집으로 겨우 서로를 붙잡고 버티던 서글픔이, 이번 한 방울로 터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었든, 카라마츠는 스스로가 불쌍하고 비참해서 안달이 났다. 제일가는 카지노의 오너인 자신이, 누군가의 목숨값을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굴릴 수 있는 자신이, 남이 시기하는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삼킨 자신이, 이리 불쌍하고 비참하다는 사실이 또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지지 않고 동등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과거를 내려다보고 비웃을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지난 몇 년을 쏟아 부었는데. 아직도 그는, 이 한 남자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언제나 예측 불허의 남자였다. 장난스러워 보이다가도 말 속에 뼈가 심어져 있었고, 진지해 보이다가도 아이처럼 웃으며 속았냐고 낄낄거리곤 하였다. 일부러 진심과 거짓말의 경계를 흐리고, 감정을 애매하게 드러내고, 마주보며 믿는다고 속삭이더라도 절대 등을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었다. 오소마츠는 한 조직의 보스였으며, 마피아의 세계는 누군가에게 속을 터놓을 만큼 녹록치 못했으니까. 말 한 마디의 무게가 금덩이로 매겨지는 이 세계에서, 그 누가 자신의 약점을 쉽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예전부터 그랬다. 단 한 번을 져주지 않았지."

 

"갑자기 왜 진지해지고 그래? 보스, 지금 살짝 좀 무서워."

 

단 한 번만, 오소마츠가 자신이 원하는 데로 행동해 줬더라면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신은 미련스럽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고, 과거에 묶여 한 번 이겨보겠다고 추악하게 아등바등 하지도 않았겠지. 단 한 번만,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이길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그는 언제나 패자였다. 이런 간단한 게임에서도, 또는 그와의 관계에서도. 상사와 부하, 사랑받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구애하는 자와 밀어내는 자, 갈망하는 자와 필요 없는 자. 그들이 한 모든 게임들은 늘 승자와 패자가 분명했다. 나는 너에게 평생 이길 수 없을 텐데, 이 멍청한 내기마저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다니. 분통이 터졌다.

 

한 때,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목소리를 갈망했다.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솔직한 속내를 속삭여주길. 등을 맡겨주길. 오소마츠만은, 카라마츠 그가 끝끝내 살아남을 거라 믿고, 언제나 곁에 남을 거라 믿고, 고단한 하루의 끝에 투정을 부려 주리라 희망했다. 자신이 오소마츠에게 쓸모가 있길, 그가 자신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길, 그에게 이끌리길. 그 때의 그는 젊었고, 얼마나 뜨거운 열정이라도 기꺼이 삼킬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는 아직 젊었으나 예전처럼 충동적이지 못했고, 성숙해졌으나 아직도 미련스러웠다. 5년이란 시간은 마음을 적당히 묻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으나, 잊기에는 찰나와도 같이 스쳐 지나가 버렸다.

 

냉방된 방의 공기가 카라마츠의 달뜬 뺨을 부드럽게 감싼다. 그러고 보니 와인을 몇 잔이나 마셨더라? 유난히 달아서 오늘따라 많이 마시긴 했지. 나중에 쵸로마츠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경을 치게 될 터이다. 아, 쵸로마츠. 나의 소중하며 유능한 보좌관. 아마 쵸로마츠는 카라마츠의 감정을 오래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대신 가주겠노라 제안도 했던 것이겠지. 굳이 고집 부리면서 간 건 자신이었다. 포기하겠노라, 자신을 밀어내는 사람에게 감정을 소비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는데. 굳이 오소마츠가 찾아와 주는 게 좋았다. 좋아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유난히 오소마츠에게 엄격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진 게 그렇게 서러우면, 오늘은 그만 할래? 무효로 치고, 다음번에 왔을 때 다시 해도 너그러운 보스는 괜찮으니까?"

 

"아니, 됐다."

 

지긋지긋한 5년의 시간 동안 마음 정리를 하지 못했다. 다잡았다 싶으면 오소마츠가 찾아와서 뒤흔들어 놓고 떠나갔다. 그래도 정말 놓을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오소마츠는 비웃듯 그의 삶에, 생각 속에 자꾸만 끼어들었다. 지난 번, 오소마츠가 입맞춤만 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괜찮다 속이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의미 없을 행동에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지니고, 스스로 짓밟기를 반복하다가 지친 그가 결단을 내리는 데에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정말 끊어내야 했다.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끊어내려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그는 해낼 수 없었다. 이리 불쌍하며 한심만 남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진정한 대인군자는 패배를 인정할 줄도 아는 법이다."

 

"뭐, 그래? 그럼 럭키~! 이제 찾아와도 안 쫓아내는 거야?"

 

술김이었을 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미 질리고 질려 지쳐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 대신, 이 카지노를 이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겠다. 쵸로마츠는 잘 해낼 테니까. 마음껏 와라. 내 알바 아니니."

 

그의 사랑, 그의 자랑, 그의 자식 같은 카지노를 넘겨준다니 그 생각만으로 가슴이 미어진다. 하지만 오소마츠를 끊어낼 수 없다면, 그들의 연결 고리가 된 카지노를 끊어내면 된다. 아이 같은 복수였다. 기어코 오소마츠가 원하는 데로 휘둘리지 않겠노라, 아득바득 이기고 말겠노라 조소하는 카라마츠의 다짐이었다. 오소마츠가 경악하는 소리가 그의 뇌를 울렸다. 미약한 두통이 이마를 뒤덮고 머리를 조인다. 소리 좀 지르지 마라, 울리지 않나. 소소한 핀잔에도 오소마츠는 꿋꿋이 말을 쏟아냈다.

 

"아니, 왜? 네가 없으면 의미가 없잖아?"

 

"5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부하를 괴롭히는 짓은 그만 두는 게 좋을 거다. 애초에 우리 내기는 카지노의 방문 유무에 관한 게 아니었나."

 

"너, 내가 그렇게 싫어?"

 

싫다. 싫다고 답하고 싶었다. 곁을 내주지 않을 거면서 내줄 거처럼 행동하는 게 싫다고, 좋아해주지 않으면서 그러는 척 건네지는 모든 온기가 싫다고. 내가 꼴 보기 싫어서 멀리 떨어진 카지노에 처박아 놨으면서 이제 와서 꼬박꼬박 찾아와 또 날 흔들리게 하는 네가 싫다고, 그런 너를 잊지 못하는 내가 싫다고. 하지만 그만큼 널 놓을 수가 없어서, 아직도 네 옆 자리가 탐이 나서, 아직도 네가 나에게 기대 줬으면 해서. 마음 편히 싫어할 수 없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고, 호소하고 싶었다. 속마음이 안에서 역류해서 그의 입 안을 엉망진창으로 구르고, 섞인다. 그렇게 몸을 불린 본심은 내뱉기에 지나치게 큰 덩어리가 되어, 그의 말문을 막는다. 붉은 카드가 그의 손 안에서 구겨진다. 오소마츠는 몸을 뒤로 기대더니, 이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겼다. 살짝 찌푸려진 눈은 그의 불만을 고스란히 표출한다.

 

"…이유나 들어보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군. 왜 카지노엔 뻔질나게 찾아오는지 말이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문장이 토막 난 듯 나오던 목소리가 뚝, 끊긴다. 입술이 꾸욱 닫혔다가, 이내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재촉하지 않았다. 네가, 뭘? 네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너를 딱히 가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내 손 밖으로 나가는 건 싫어서. 네가 내 부하니까, 이 정도는 내 권리니까. 아이처럼 뻔뻔하게 소유욕을 주장할 그가 벌써부터 상상되어,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네가 그리우니까."

 

오소마츠도 술을 어지간히 마셨나 보다. 그의 양 뺨이 붉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앞의 화투 패들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이, 유난히 신경질적이다. 이 정도도 모르냐고, 꼭 내가 직접 말해야 하냐고 부리는 투정처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빤히 바라본다. 끈질긴 시선에 오소마츠의 뺨이 한층 더 붉어진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결단을 내린 후였다. 긴 들숨을 들이마시고,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낸다.

 

"마피아 때에는 그렇게 내 곁에 붙어 다녔으면서 말이야. 근데 너는 늘 예측 못하게 엉뚱한 구석이 있으니까, 갑자기 어디로 사라질 것 같았단 말이지. 그래서 좀 얌전히 있으라고 카지노를 맡겼더니, 거기에 콕 박혀서 날 보러 오지도 않지. 내가 기다리다 못해 직접 찾아가기 시작하니 날 쫓아내고. 카라마츠는 보스 안 보고 싶었음? 은근 많이 서운하단 말이지?"

 

얼척이 없었다. 기가 찼다. 허, 텅 빈 웃음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뭐라고? 내가 찾아갈 때마다 늘 귀찮다는 듯 행동한 게 누구인데? 그래서 눈에 보이지 말라고 카지노를 맡긴 게 아니었나? 그래서 얌전히 카지노 관리해 주었더니 이제 와서, 뭐? 서운하다고?"

 

"내가 언제 귀찮다고 했음? 오히려 그 반대였거든? 네가 올 때만 기다렸거든? 근데 나도 자존심이 있지, 그거 티 내면 안 되니까 숨긴 거거든? 너 원래 손에 쥔 거에는 관심 없으니까 말이야!"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오소마츠. 원래부터 바보이긴 했지만! 네 그런 태도가 문제다. 사람 혼동하기 딱 좋게 말을 하지 않나. 지금도,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꼭 날 좋아하기라도 한 것처럼 들리지! 지난번 입맞춤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가볍지 않다는 걸 기억해라. 넌 생각 없이 한 입맞춤이라도 말이어도 나에겐 아니었단 말이다!"

 

이런 건 어른스럽지 않은데. 멋지며 성숙한 카지노 오너가 할 법한 언행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속으로 야단치면서도 카라마츠의 몸은 그의 의지에 반하며 과격하게 움직인다. 허공을 휘젓던 손이 이내 주먹을 쥐고, 탁자를 내려친다. 지긋지긋했다. 자그마치 5년 동안, 아니 그걸 훨씬 더 뛰어넘는 시간동안 담아놓은 진심이 터져 나오는 기분은 상쾌했다. 그와 동시에, 돌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묵직함을 없앨 수가 없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바라보는 오소마츠의 시선 때문인지, 가시 돋친 카라마츠의 독백을 듣고 굳어진 그의 입가 때문인지. 까만 눈동자가 잠시 맞은편의 푸르른 두 눈을 응시하다가, 이내 바닥을 향한다. 무거운 침묵이 안개처럼 그들 사이를 에워싸고, 속내를 가린다. 여전히 술기운 때문에 멍한 머리를 손끝으로 쓸며, 카라마츠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제아무리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에 관하여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고 하여도, 그 전에 그들의 관계를 자각해야 했다. 마피아의 수장과 그의 아래서 카지노를 운영하는 부하. 선을 넘으면 안 되었다. 선을 넘는 게 그가 곁에서 언제나 갈망하던 꿈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숨겼어야 했는데, 어리석게도.

 

"…미안하다. 감정이 과격해져서 하면 안 될 말들을 해버린 것 같군. 오늘은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오소마츠. 카지노의 경영권에 관해선… 지금은 보류하도록 하지."

 

그들이 카라마츠의 개인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래층에 대기하는 다른 부하들의 불안함만 커질 것이다. 게다가 쵸로마츠는 이미 업무가 많았다. 하루 종일 VIP실의 관리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손끝으로 두 눈을 지압하던 오소마츠가, 이내 얼굴을 문지르고서 카라마츠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게 말이야, 널 헷갈리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나라도 아예 관심 없는 사람에게 입맞춤을 하진 않거든. 뭐, 카라마츠니까 눈치 못 챌걸 알고 있었지만~."

 

습관적으로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헤실 거리는 미소를 짓다가, 카라마츠가 늘어놓았던 비난들을 기억하였는지 중간에 멈춘다. 반쯤 웃고, 반쯤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기괴한 울상을 빚어낸다.

 

"넌 나를 볼 때면 늘 눈이 반짝반짝했단 말이지. 무슨 대단한 사람 보는 것 마냥…. 아, 물론 내가 카리스마 레전드이긴 해도? 아무리 나라도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시선 받으면 부담스러우니까~. 내가, 네가 생각하는 만큼 멋진 사람이 아니라면 네가 떠나갈 것 같았단 말이지. 내가 붙잡기에 넌 지나치게 생기가 넘쳤고, 또 욕심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네가 실망하더라도, 네가 떠나지 못하게 붙잡을 게 필요했어. 그래서 너에게 카지노를 맡긴 거야. 나에게서 거리는 좀 생겨도, 발은 묶어놓을 수 있잖아? 내가 널 보기 싫어했다 느니 뭐니,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지. 게다가 살짝… 내가 너에게 빠졌다는 걸 부정하고 있기도 했고? 조금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꼭 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잖아.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부정할 수도 없게. 너도 날 좋아했다면, 너도 날 원했다면. 지금까지 내 노력들은, 내 끙끙 앓던 가슴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녹아내리는 솜사탕처럼 달콤할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처럼 노을을 배경으로 입을 맞출 지도 몰랐다. 열정으로 달궈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다시금 마음을 고백할 지도 몰랐다. 그에 비해 이 순간은 지나치게 초라해서, 보잘것없어서. 허무하면서도 무거워서. 이런 역겨운 감정이 기쁨일 리 없었다. 사랑은 멋진 감정이었다. 이런 끔찍하며, 고통스럽고, 미련스러운 게 아니었다.

 

지난 몇 년을 감정을 외면하며 살아왔다. 사랑을 부정하고, 애정을 무시하며 스스로가 과거를 놓을 수 있다 거짓말하며 버텨왔다. 그렇기에 지금 와서 스스로의 감정을 분석하라는 건 지나치게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이 사랑인지 혐오인지, 슬픔인지 기쁨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을 한 군데 모아서 휘저어놓은 거대한 솥 안에서 그는 익사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숨을 고르는 행위마저 발버둥이었기에, 오소마츠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알 수 없는 혼합물이 그의 입 안으로 들이닥치고 그의 목구멍을 막아 놓으리라. 카라마츠의 침묵을 거절로 이해한 것인지, 오소마츠는 삐뚤어진 미소를 짓는다. 카라마츠는 그 표정을 잘 알았다.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을 때마다, 오소마츠는 저런 미소를 지었다.

 

"지금 와서 이렇게 고백 해봤자, 5년이 지났고…. 이미 늦었으려나. 네 눈에 나 완전 쓰레기였던 거네, 나. 그래도 상사로서 오해는 풀어야 하니까 말이야, 우리 차근차근 이야기 하는 시간을 좀 가질까."

 

오소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깨에 걸쳤던 양복 재킷의 옷매무새를 다듬고서, 이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미소를 짓는다. 내뱉지 못한 이별이 그의 얼굴에 스며들어 팬 주름이 된다. 미소나 울상이나, 얼굴이 접히고 일그러져 거미줄 같은 금이 가는 건 똑같았다.

 

"다음번에 다시 올게. 미리 연락 할 테니까 나 쫓아내지 말고, 도망가지도 말고. 그리고 쵸로마츠에게 부탁해서 술은 네 손 안 닿는 곳으로 다 옮겨라."

 

갈 때까지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핀잔을 멈추지 않는다. 망설이듯 발끝으로 바닥에 문양을 낙서하던 오소마츠는, 이내 성큼성큼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선사한다. 카라마츠는 그를 막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그를 때리지도 않는다. 굳이 그럴 의미도, 힘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오늘 한 말들은, 다 진심이니까. 보고 싶었다는 말도, 좋아한단 말도."

 

그럼, 곧 다시 보자. 오소마츠는 발걸음은 빠른 속도로 작아졌다가, 이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멎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림에, 카라마츠는 눈을 감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다가, 이내 오소마츠의 입술이 온기를 남긴 부분을 엄지로 쓴다. 아무것도 안 바뀔 지도 몰랐다. 이제 와서 속마음을 터놓기엔 시기를 놓쳤을 터이다. 이제 와서 오해를 푼다고 하여도, 과거를 들춘다 하여도 좋을 게 무엇이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마츠는 카지노의 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그를 비난하고,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혀를 내두를 것이다. 젊은 날의 사랑을 추구하기에 그는 이미 늙어버렸다. 5년의 시간은 가랑비처럼 그를 적셨고, 그가 온전히 마르기 전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늘 마지막 기회라는 건 있지 않았나? 오소마츠가 두고 간 화투를 조심스럽게 모아 정돈한다. 자신이 구겼던 화투 패를 다시 피고 맨 위에 올린다. 익숙하게 패들을 섞으니, 그 패조차도 멀쩡한 것들에게 섞여 자취를 감춘다. 이 감정도, 이 혼란스러움도, 잘 하면 다른 것들에게 묻혀 없는 척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카지노는 아무리 헛된 꿈과 희망이라도 사고팔며 그 열정으로 빛나는 곳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