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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단편

[이치카라] 2522880000

니트 이치마츠 x 사변 카라마츠

그리스 로마 신화 중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심장의 박동 수가 정해져 있다는 말을 믿는가?

    마츠노 가문의 사남, 이치마츠는 그 숫자를 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에는 그 능력 때문에 부모님의 걱정을 꽤 사기도 하였으나, 머리가 좀 크면서 비정상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닫게 되었다. 어렸을 적 순수한 그의 질문에 당황했을 그의 부모가 조금 안쓰러웠을 뿐이다. 사람들의 가슴팍에서 빛나는 숫자가 뭐냐고 물어보는 꼬맹이라니. 마츠조와 마츠요는 그 사건들을 상상 친구와 비슷한 사건들로 치부해 넘겨버렸으니, 그로선 정신병동에 입원하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인 셈이었다. 이치마츠는 자신의 능력을 크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다. 딱히 실생활에 쓸모 있는 능력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떠벌리고 다닐 만한 것도 아니고. 말한다고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때때로 그의 형제들이 어렸을 적을 언급하며 놀릴 때에나 숫자가 10도 안 남았다고 대꾸하는 식으로 대충 넘길 뿐이었다.

    능력은 이치마츠를 염세적으로 만들었다. 실시간으로 숫자가 줄어들며 사람들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게 보이는데, 오히려 낙관적으로 사는 게 힘들지 않을까, 그는 스스로 변명한다. 사람들마다 지닌 숫자는 다 제각각이었다. 아이들은 보통 삼십억쯤 되는 숫자를 띄었고, 노인들은 보통 백만 이하였다. 젊어 보이는데도 숫자가 적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숫자가 많이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는 성격이 좋은 사람들도 있었고, 나쁜 사람들도 있었으며 상냥한 사람들도 괴팍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떻게 살든 살해당할 만큼의 원한이나 과도하게 건강만 망치지 않는다면, 또는 불우한 사고만 당하지 않는다면 명줄에는 큰 영향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노력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어차피 삶은 60살이 넘어가면 다 비슷비슷해지겠지. 더 오래 살아봤자 추할 지도 몰라. 그렇기에 이치마츠는 걸음을 멈추었다. 움직이는 걸 멈추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어차피 명백한 삶의 끝을 직시하면서도 의미라는 것을 찾아낼 용기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그의 심장 박동 수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십육억 하고도 삼천 사백 오십 육만 이천 이십 일, 이십육억 하고도 삼천 사백 오십 육만 이천 이십. 큰 변수만 없다면 한 60년 조금 넘게 살고 여든쯤의 나이에 평화롭게 끝을 맞이하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의 형제들도 다 비슷비슷한 숫자를 지니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주 화를 내는 쵸로마츠가 수명이 조금 덜 한 정도일까. 꾸준히 운동을 하는 쥬시마츠는 심장 박동 수가 남들보다 느렸다. 아마 그들 중에서 제일 장수하는 건 그가 될 것이다. 길어 봤자 1~2년의 차이가 아닐까 싶었지만. 이치마츠는 형제 중 마지막으로 죽을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마지막은 외로웠다. 형제를 모두 떠나보내고 그 홀로 남는다면 심장이 마지막으로 피를 쥐어 짜내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찾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굳이 수명을 꽉 채워서 살아야 할까, 고민한 적도 많았다. 천천히 몸속의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걸 기다리는 것보단 스스로 부서트리는 게 더 깔끔하고 만족스럽지 않을까? 평생을 망나니의 칼자루를 기다리는 사형수의 기분으로 사는 것보단 스스로 망나니가 되어서 자기 자신의 목을 자르는 게 더 유쾌한 이야기가 아닐까?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아프니까. 아픈 건 질색이니까. 따끔거리는 바늘의 고통도, 종이에 손이 베여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는 감각도, 심장이 아프도록 뛰어서 저릿한 느낌도 모두 싫어했다. 특히 마지막은 그만큼 수명이 빨리 줄어든다는 의미니까, 더욱 질색했다. 그래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싫어했다. 태연히 남의 수명을 깎아먹고 있으면서 거울이나 매일 보는 인간. 자기 형제가 자신을 무슨 눈빛으로 바라보는지도 모르고 스스로만을 바라보는 인간. 이치마츠는 그런 카라마츠가 끔찍했다. 저딴 인간,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인간을 어쩌다가 사랑하게 된 건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심통이 나서 또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아야! 새된 비명소리를 무시하고 언제나 처럼 구석진 자리에 자 웅크려 앉는다.

    "갑자기 왜 때린 건가, 이치마츠? 난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닥쳐, 쓰렉마츠. 할 일도 없이 거울이나 보고 있는 주제에."

    그 거울 속에 보이는 스스로가 뭐라고. 대체 얼마나 완결무결하고 고고하고 완벽한 존재라고 눈을 못 떼는 것인지. 카라마츠는 늘 그랬다.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애정이다. 카라마츠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고, 상냥한 자기 자신을 사랑했으며 멋진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다만 멋의 개념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뒤틀려 졌기에 야유를 받을 뿐. 이치마츠는 그 사랑이 지긋지긋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 박자에 맞춰 내려가는 숫자에 눈을 고정했다. 고개를 들어 카라마츠를 바라본다. 숫자는 참 규칙적이게도 줄어들었다. 이치마츠가 볼 때, 카라마츠의 심장 박동은 늘 일정했다. 어떻게 저렇게 흔들림이 없는지. 그나마 빨라질 때는 오소마츠가 갑자기 놀래키거나, 이치마츠에게 공공연하게 미움 받을 때쯤이었다. 지그시 노려보자 그제야 시선이 거울에서 이치마츠로 옮겨왔다. 두 눈동자가 마주친다. 카라마츠의 심장 박동이 살짝 빨라지는 게 보였다. 서둘러 다시 시선을 거울로 돌리는 그를 보며, 이치마츠는 얕게 혀를 찼다. 왜, 살해 당할까봐 무섭기라도 하냐.

    차라리,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차라리 네가 스스로를 덜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흠이라도 발견한다면. 그래서 스스로를 조금만 싫어하게 된다면, 그 빈자리에 내가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네 심장 한 켠에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무슨 의미라도 있기를, 스스로의 자아를 실현하는 도구에서 벗어나기를. 딱 그만큼만 원했다. 이 쪽은 카라마츠 때문에 수명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데, 그 정도는 원해도 괜찮지 않을까. 별 거 없는 꿈인데 카라마츠에겐 너무 원대한 소원이었던 건지, 그는 도통 시선을 거울에서 떼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이치마츠가 그를 헐뜯고 비난하고 힐난할수록 그는 거울 속 자신에게 더욱 더 몰입했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자신을 찾아서. 진절머리가 나도록 질렸음에도 이치마츠가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딱 그 이유 하나였다. 이렇게 알량한 발버둥이라도 쳐야 제자리에라도 머물 수 있어서.

    얼굴을 무릎에 묻고서 눈을 감는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가끔씩 그는 생각한다. 카라마츠를 바꿀 수 없다면 그에게 스스로를 강요하는 건 어떤지. 그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은 동생에게 약하니까, 그 점을 이용해서 사랑해 달라고 매달리는 건 어떨지. 절로 비참해져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달리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친 형을 좋아하는 놈이라니, 소름 끼치지. 보통 쌍방이라고 기대 못 하지. 하면 안 되지. 설사 쌍방이더라도 - 아니지만 - 이루어지면 안 되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생각을 엮어나갈 수록 가까워지는 답은 죽음뿐이었다. 죽었다 깨어나야 가능성이라도 있는 사랑. 내세만을 기다리며 묵혀야 하는 사랑.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심장이 이십억 번 넘게 뛰는 동안 이 마음을 뒤로 남기고 나아갈 순 없을지, 막연히 궁금해졌다. 직감적으로 불가능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괜히 희망을 걸어본다. 끝이 죽음이라니,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 아닌가. 카라마츠처럼 운명이니 뭐니를 믿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치마츠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차라리 믿고 싶었다. 운명은 참 편한 면죄부였다. 원래부터 그렇게 되도록 이야기가 설계되어 있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어떤 발버둥을 쳤어도,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았어도 찾아왔을 결과라고. 그러나 이치마츠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가 맞이한 결과는 고스란히 그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되었다. 그때 맷돌을 던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내려가서 풀어달라고 할 걸. 전화가 왔을 때 좀 더 신경을 쓸 걸. 그날만큼은 치비타에게 밀린 외상값을 낼 걸. 아니, 애초부터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주어진 심장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의 집은 결코 작은 편이 아니었다. 풍족한 살림은 못 되더라도, 자식이 여섯 명이나 있으니 그만큼의 공간을 요구했다. 그 넓은 공간이 곡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딜 가든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흐느낌은 그를 질책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네가 맷돌만 던지지 않았더라도! 그 넓은 공간 속 숨을 곳이 한 곳도 없었다. 쳇바퀴 속에 갇힌 듯, 도망가도 똑같은 비난의 시선들이 그를 관통한다. 두근, 두근, 두근, 이런 와중에도 심장은 뛰었다. 도대체 왜 뛰는지, 왜 이리 빨리 뛰는지, 차라리 멈춰버리면 좋을 것을. 거친 숨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오소마츠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치마츠, 괜찮아? 너 그 일 이후로 잠을 한 숨도 못 잤잖아. 너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신경 꺼."

    "아니, 진짜로. 연속으로 초상 두 번 치르긴 싫거든, 형아는. 2층 가서 쪽잠이라도 자."

    억지로 밀며 재촉하는 오소마츠를 거부할 힘도 의지도 없어서, 이치마츠는 억지로 발을 윗층을 향해 옮겼다. 시야의 구석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형제들이 얼핏 보였다. 피곤한 듯 인상을 쓰면서도 조문객을 깍듯이 안내하는 쵸로마츠, 마츠요를 도와 음식을 나르는 쥬시마츠 그리고 토도마츠.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모두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누구보다 제일 먼저 울었고 누구보다 제일 많이 울었기에, 눈물이 제일 먼저 동나버린 가족들은 가슴으로 슬픔을 토해내며 각자 할 일을 해냈다. 이치마츠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응어리를 짊어진 심장들은 힘겹게 뛰고 있었다. 집 안을 거니는 죽음의 존재가 그들의 수명마저 앗아가 버리는 듯이.

    비척이며 2층으로 올라가자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것이 카라마츠의 거울임을 깨달았다. 질리도록 바라보던 거울. 넌 도대체 이 속에서 무엇을 봤을까. 거울을 들어 스스로를 비추니 시뻘겋게 충혈된 눈과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건 귀신도 인간도 아닌 요괴같은 꼴이라, 이치마츠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오소마츠가 그렇게 걱정하며 억지로 등을 떠민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잠을 잔 게 언제였더라? 그 소식을 들은 이후로 유령에 쫓기듯 밤마다 가위에 눌리고,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고 악몽을 꾸었다. 좋아하지도, 잘 마시지도 않던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속이 울렁거려 밥도 먹지 못했다. 죽을 것 같단 느낌이 딱 어울리는 상태였다. 죽지 않겠지만. 자기 심장이 위치한 곳을 내려다보나 이치마츠는 조소했다. 왜 자신의 수명은 이리 쓸데없이 긴 것인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니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아니, 뜨고 있나? 세상이 뒤집어지고 땅이 올라온다. 이치마츠의 몸은 그대로 바닥과 충돌하고 이내 그의 시야는 검게 점멸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건 어두컴컴한 암흑이라 그는 눈을 두어 번 더 깜박이고 나서야 자신의 눈이 감기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디에선가 똑,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서늘한 바람이 그의 피부에 입을 맞춰 잇자국으로 소름을 남겼다. 점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는 자신이 어느 동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분명 집에 있었는데, 왜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뒤통수가 욱신거렸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그대로 바닥에 박은 것인지. 그 고통으로 이치마츠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꿈이 아니라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꿈이든 아니든 그딴 사실은 현재 그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의 뒤에서 물이 크게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앞에는 작은 연못이 위치해 있었다. 물 아래 신비로운 광원이라도 있는 것인지, 수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중간에 서 있는 한 사내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츠노 가의 삼남과 꼭 빼닮은 그는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몸에는 흰 정장을 걸쳤으나 신기하게도 몸에 물기가 전혀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초록 눈은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색을 띠고 있어서, 이치마츠는 그가 인간이 아닌 것을 직감했다. 그의 몸에 걸쳐지듯 둘러진 긴 천은 춤을 추듯 수면의 움직임에 맞춰 제 꼬리를 팔랑거렸다. 이치마츠의 눈이 습관적으로 가슴을 향했다. 모든 인간이 짊어지는 수명의 숫자가, 그에겐 없었다.

    "안녕하세요, 인간. 나는 인간들의 인연을 관장하는 여신. 당신은 잃어버린 당신의 인연을 찾고 있군요."

    "아니, 그, 쵸로마츠 형? 지금 이게 무슨……."

    쵸로마츠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이치마츠는 차마 다른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제일 상식적인 사고가, 그의 형제들이 모종의 이유로 그에게 몹쓸 장난을 치고 있다는 추론이었으니. 이 모든 게 현실임을 자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꿈 같았다. 섣부르게 말이 끊긴 쵸로마츠는, 여신은,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수면을 담은 듯 일렁이는 눈에는 동정이 비치고 있었다.

    "신이라는 존재를 인간의 뇌가 담으면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죠. 그렇기에 당신은 지금 저를 당신의 형, 그러니까 쵸로마츠라는 존재로 인식하는 겁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그게 제일 편할 테니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걸로 치자면 당신의 능력도 꽤 말이 안 된다 생각하는데요."

    날카로운 반박에 이치마츠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살아가는 내내 그의 능력이 말이 안 된다 생각해왔다. 근데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결국 그 능력도 신들이 부여한 게 아닌가? 운명이란 게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카라마츠는. 불현듯 차오르는 의문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신은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참고로 신이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능하진 않습니다. 딱히 발전을 할 의욕도 없는 쓰레기 동정 니트 인간들에게 큰 관심을 쏟아 부을 순 없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특별하니까요, 이치마츠. 당신에게는 능력이 있으니까, 제가 특별히 기회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무슨……."

    "당신의 뒤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연못에서 빛이 흘러나와 이치마츠의 뒤를 밝혔다. 두 길은 얼핏 보기에 똑같아 보였는데, 그 끝들이 암흑에 삼켜져 있어 종착지초자 알 수 없었다
.
    "오른쪽 길로 가면 당신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왼쪽 길로 가면 저승으로 가게 됩니다. 오른쪽 길로 가면 여기서 일어난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것이고, 왼쪽 길로 가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신은 이치마츠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가시처럼 박힌다. "왼쪽 길로 가면 잃어버린 당신의 형을 되찾을 지도 모르지요. 어느 길로 가겠습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물어? 나는, 당연히. 머릿속에선 답이 정해져 있었으나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 한 편에선 그저 오른쪽 길을 택하고 모든 걸 잊고서 살아가고 싶었다. 찾을 기회라느니 뭐니 너무 무겁잖아. 내가 실패한다면.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면. 연속으로 두 번이나 초상을 치르긴 싫다는 오소마츠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카라마츠를 다시 데려올 수 있다면. 딱 한 번만 더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서, 그에게 사과할 수 있다면. 그의 손을 잡고서 온기를 느끼고, 그에게 남은 심장 박동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발이 질질 끌리듯 앞으로 나아간다. 온 몸이 항의하는 기분이었다. 싫어! 돌아가! 가지 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치마츠는 앞으로 나아갔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음에도 온 몸에서 땀이 주륵주륵 흘러내렸고 숨이 가빠진다. 그는 자신이 가면 안 될 곳으로 발을 내딛고 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꼈다.

    "그 길을 선택하시나요. 부디, 당신에게 가호가 있기를."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못에서 흘러나오던 미약한 빛은 얼마 가지 않아 어둠의 벌려진 입 안으로 녹아 사라졌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바닥을 맞이하는 바닥이 사라지고 저 깊은 아래로 추락하면 어떡하지, 공포가 냉기와 함께 스며들었다. 저 깊은 어둠에게 삼켜서 평생을 이 형태 없는 괴물의 뱃속을 헤매며 보내게 되면 어떡하지. 열 걸음도 안 되는 시간동안, 뒤를 돌아서 되돌아갈까 하는 후회가 수도 없이 들었다. 그가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멈추는 순간 모든 방향 감각을 잃고서 자신이 향하는 길인지 앞인지 뒤인지, 또는 옆인지 정말 모르게 되리란 두려움이었다. 이미 길을 잃었을 지도 몰랐다. 한 발자국, 살짝 틀어진 선택이 그의 길을 완전히 뒤틀어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잘못 선택한 단 하나의 행동이 그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듯이.

    어둠의 끝은 빛이 아니었다. 어둠을 끝내는 건 형태를 일그러트리는 수많은 형태들이었고, 흐느끼는 소리였으며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었다. 빛은 그 뒤에 따라왔다. 여전히 거대하고, 춥고, 어두운 동굴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노인들, 젊은 아이들, 연인들, 홀로 서 있는 사람들……. 죽어서도 그들의 심장 위에는 숫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보이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동그라미 하나만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간간히, 열 명에 한 명쯤 꼴로 아직 숫자가 다 닳지 않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 숫자들은 많기도 했고 적기도 했다. 숫자가 무엇이든, 모든 사람들은 공통점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수명은 바뀌지 않았다. 얼마나 울고, 떠들고, 기다려도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고, 그렇기에 가슴 위 숫자도 바뀌지 않았다. 모두가 죽은 그 순간에 멈춰 선 것처럼.

    누군가 이치마츠를 뒤에서 확, 밀었다. 팔을 사방으로 흔들어 겨우 중심을 다시 잡고 뒤를 노려보자, 어느새 형성된 긴 줄이 보였다. 눈을 깜박이고서 앞을 바라보자 그는 자신이 어떤 긴 행렬의 일부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까마득히 먼 저 줄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문으로 들어가고, 다시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뱀처럼 꼬아져서 늘어진 행렬은 움직일 공간을 많이 주지 않았다. 흐름에 맞춰 주춤주춤 앞으로 나아가다가, 이치마츠는 결국 용기를 내어 제 앞의 사람을 쿡, 찔렀다. 돌아본 남자는 놀랍게도 이치마츠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다용? 넌 왜 여기 있냐!"

    "데카판이 새로운 신약을 개발했다용! 근데 부작용으로 죽어버렸다용! 귀신이 되어서 복수할 거다~용!"

    평소처럼 헤벌쭉 웃는 얼굴로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온몸에 쫙 퍼졌다. 다용이라면 실제로 가능할 것 같아 더욱 두려웠다. 난 누군가 귀신이 원한을 품고 괴롭힐 만한 일은 하지 않아야지. 그의 인생을 돌이켜보자면 이미 귀신이 둘 쯤 붙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아니, 세 명인가. 카라마츠가 바보같이 착하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그의 곁에서 어색한 가족상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귀신 붙은 인간이 저승에 오면 귀신은 어떻게 되는지 몰랐으니 확신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다고 치고. 저기, 그……. 이 줄, 뭐하는 줄인지 아냐."

    "하데스님에게 심판받는 줄이다용! 지금 여기서 5시간 기다렸다용! 근데 줄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용!"

    "하데스?"

    "죽음의 신이다용! 무슨 지옥에서 얼마나 썩을지 정해주신다~용!"

    그렇다면 카라마츠도 자신의 줄 앞, 어딘가에 있다는 의미인가. 이치마츠는 인파 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그 중에서 제 형을 찾는 건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잘 자각하고 있었다. 눈앞의 형태만 겨우 분간할 만큼 어두운 조명 때문이기도 했고, 얼굴의 윤곽이 서로 섞여들고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밀집된 공간이기도 하였다. 5시간 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었단 다용의 말을 들으니 또 자신은 얼마나 기다려야 자신의 차례가 올지, 머리가 아파왔다. 차라리 줄을 이탈하고 사람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카라마츠를 찾는 게 더 효율적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어영부영 기다리는 사이에 카라마츠는 이미 하데스인지 하기스인지 하는 신에게 먼저 다다랐을 지도 몰랐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안절부절 못하는 이치마츠를 빤히 바라보던 다용이, 이번에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다용? 많이 바쁘다용?"

    "어? 어, 조금……?"

    "잠깐만 기다리다용~!"

    다용이 잠시 호흡을 고르는 듯 싶더니, 이내 입을 크게 열고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공기를 찢고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굴에 휘몰아치는 강한 바람에, 이치마츠는 어떻게든 날아가지 않으려고 바닥에 눕다시피 해야 했다. 어쩌면 자신의 능력처럼 다용의 입도 어떠한 능력이 아닌가 싶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설명할 수가 없지 않은가! 저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음에도, 어떻게 한 인간 안에 그 경이로운 공간과 생태계가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사람들을 삼키던 다용은, 이내 크게 트림하며 입을 닫았다. 그들의 앞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저 사람들 중에 카라마츠가 있었으면 어떡해? 당황한 이치마츠가 따지기도 전에, 다용은 그를 문을 향해 밀며 재촉했다.

    "자, 어서 가는 게 좋을 거다용! 하데스님은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용!"

    "야 이 새끼가-!"

    쿵, 무거운 나무문이 그의 뒤로 닫힌다. 비라서 맞은 듯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서늘한 공기가 그의 뺨을 훑고서 피부 속으로 스며든다. 이치마츠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 정도 쓰레기면 재판이나 심판 같은 거 당하기도 전에 영원히 지옥에서 썩는 거 아닐까. 아니, 그것도 과분하다고 곧바로 소멸당하는 건 아니야? 몸이 벌벌 떨렸다. 죽고 싶다고 습관처럼 말하고 카라마츠를 따라 죽을까 생각까지 했으면서, 정말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야, 너. 살아있는 인간이잖아?"

    "그게……. 어쩌다보니……."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귀에 익었다. 눈알만 도륵도륵 굴려 겨우 앞을 바라보니 제 앞에는 똑 닮은 얼굴이 보였다. 쌍둥이처럼 닮은 게 아니라, 똑같은 사람처럼 닮은. 분위기며, 부스스한 머리카락이며. 카라마츠나 입을 법한 묘하게 기분 나쁜 디자인의 옷만 아니었더라면, 이치마츠는 자신이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머리 세 개의 고양이를 무릎에 두고서 나른하게 쓰다듬고 있는 하데스는, 이치마츠와 똑 닮은 사내였다. 그는 물끄러미 이치마츠를 바라보더니 혀를 쯧, 찼다. 조용히, 하지만 다 들리게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보나마나 또 그 여신 짓이네. 맨날 툭하면 자기 실수로 사람 보냈다 데려갔다 그러지. 지난번에는 뭐? 카라마츠라는 놈이 오면 심판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이젠 살아있는 인간을 보내? 내가 아주 만만하지 그냥?"

    "어, 그, 카라마츠를……알아? 요?"

    익숙한 이름이 언급됨에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그의 판단을 앞섰다. 그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이치마츠는 지그시 혀를 깨물었다. 아무것도 아닌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이야 익숙했지만, 그래도 그는 인간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제아무리 쓰레기라도 제일 기본적은 인권은 보장 받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저승에선, 다용이니 신이니 비현실적인 것들이 가득한 이 세계에선 그는 정말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눈앞의 사내의 기분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그야말로 태풍 앞에 선 촛불만큼이나 불안한 목숨.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수명이 닳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그러고 보니 그 안쓰러운 놈이랑 닮았네. 형제? 가족?"

    "육둥이……임다."

    "그리고?"

    "예?"

    어벙한 표정을 짓는 이치마츠를 바라보며 하데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탁자 위 서류더미들을 뒤적거리더니 유독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 크게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마츠노 카라마츠. 사인은 사고사. 맷돌로 얻어맞은 머리에 대해 두통을 호소하다가 병원으로 가는 중 차에 치임. 이 별 볼일 없고 평범한 자식에게 뭔 볼 일이 있어서 네가, 살아있는 인간이 왔냐고."

    "아, 그게……."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이 철근같이 무거웠다. 내 인상이 저렇게 나빴던가? 토도마츠가 맨날 어둠마츠라고 놀리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카라마츠가 자신을 볼 때마다 놀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의 표정이 늘 좋지 않은 건 알았지만 저렇게나 험상궂었나. 왼쪽 길로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신의 목소리가 그의 의식 속으로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여신의 같잖은 장난이라고, 실수라고 거짓말을 치고 되돌아갈까. 침을 삼켰으나 입은 이미 바싹 메말라서, 그의 목울대는 큰 성과 없이 움직이기만 했다. 여기까지 왔다. 그저 돌아갈 순 없었다.

    "그, 별 볼일 없고 평범한 자식을……. 다시 데려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음."

    짧은 한 마디 속에서도 이치마츠는 온갖 의미를 읽어 내렸다. 인간 치곤 용기가 가상한가. 지나치게 가상해서 제정신이 아닌가. 귀찮게 됐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좋게 볼 순 없는 대답이었다. 딱히 더 읽을 것도 없는 서류를 한 번 더 눈으로 훑고, 삼두묘三頭猫를 쓰다듬다가, 이내 다시 짤막한 소리를 냈다. 음.

    "왜?"

    "예?"

    "왜 다시 데려가고 싶은 건데?"

    그거야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그거야 형제이고 가족이니까. 그거야……. 온갖 이유가 입 속에 맴돌았으나 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저 신이 원하는 건 그딴 얄팍하고 알량한 변명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앞에 두고서, 그는 차마 스스로에게 거짓말 할 수 없었다. 늘 품고 있었으나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입에 담는 건 어려웠다. 스스로도 잊어버릴 만큼, 살짝 빨라지는 심장 박동으로 겨우 기억했던 오래된 마음을 다시 발굴해내어 묘사하는 건 힘들었다. 스스로도 보기 싫어 깊숙한 데 처박은 마음을 다시 꺼내고 남에게 전시하듯 보여주는 건 고통스러웠다. 이치마츠는 숨을 골랐다.

    "왜, 가끔씩 드는 느낌 있잖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 예지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찜찜한. 문득 떠오른 생각 주제에 확신을 지니고 있어서 외면하지도 못하고 어느새 믿게 되어버리는, 그런 예감들."

    "음."

    "하늘을 보며 문득 비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는 두 남녀를 보며 서로 좋아하는구나 깨달아버리고, 자판기에 돈은 이미 집어넣었는데 버튼을 누르자마자 내 음료수는 나오지 않겠구나, 납득해 버리는 거.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던 내가, 어느날 문득 보고서, 아 나는 얘를 사랑하게 되겠구나, 자각해 버리는 거."

    말이 더 빠르게 흘러나온다. 담을 쌓고 그저 흘러넘치길 기다리던 마음은,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그 끝을 몰랐다.

    "부정해도 어쩔 수 없고, 외면해도 필연처럼 들이닥칠 내 스스로의 감정이 야속해서 되려 숨이 막히죠. 도망치고 싶어도 결국 나는 돌아가게 될 걸 알기에 시도도 하지 못하게 포기하게 되고. 나는 널 사랑하게 되겠구나, 지독하게 외로운 사랑이겠구나, 넌 끝까지 내 감정을 몰라주겠구나. 가끔씩 드는, 예감 있지 있잖아요? 이유도 없이 확신하게 되는 미래라던가. 하필 나에겐 그게 걔였어요.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친 형이어서.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래서, 결론이 뭔데?"

    "그 놈 없이는 못 살 것 같아요. 신이라는 작자가 있으면 운명도 있을 거 아니야. 차라리 내가 죽어도 좋으니까, 카라마츠 만큼은 다시 돌아가게 해주십쇼. 부탁드립니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그냥 다시 데려 가지 그래. 어차피 수명도 넉넉하게 남았고……."

    데려와, 놀랍도록 상냥한 목소리로 고양이에게 속삭이자 삼두묘는 가르랑거리며 무릎에서 뛰어내렸다. 이렇게 쉽게? 허무하게? 저기, 조금 전 제가 심장을 쏟아낸 사랑 고백은요? 괜히 억울한 마음에 들어 배가 아파왔지만 이렇게 쉽게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지 싶기도 했다. 사랑을 증명할 만한 극적인 연출도 필요가 없었고, 희생도 없이 손쉽게 떨어진 허락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멀리서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그들이 다다르기 전, 하데스는 입을 열었다.

    "다 좋은데, 조건이 하나 있어. 이제 여기서부터 밖으로 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

    이치마츠가 대답을 하기 전, 그의 품으로 누군가가 와락 안겨왔다. 눈물 나도록 그리웠던 향기가 그의 감각 위로 쏟아져 내린다. 두 팔로 단단히 감쌀 수 있는 육체가, 천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귓가에서 기쁜 듯 울리는 웃음소리와 뺨을 스치는 머리카락마저 목이 멜 정도로 반가웠다.

    "이치마츠! 날 다시 데리러 와줬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여!"

    "어, 어쩌다보니 그런 거거든. 호들갑 떨지 마. 애냐?"

    "그렇게 말은 해도 내가 보고 싶었겠지! 나도 많이 보고 싶었다, 이치마츠."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볼세라 이치마츠는 서둘러 카라마츠를 밀쳐냈다. 가자, 가족들 기다린다. 무뚝뚝하게 말하고서 먼저 앞장서자 기다리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하데스의 앞을 지나치며 가볍게 묵례를 했다. 어째서 죽음의 신이 자신과 꼭 닮은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내어준 기회만큼은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심판장을 나가 다시 동굴에 발을 내딛자 어느새 그 곳은 사람들로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다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인파들 사이에서 카라마츠가 자신을 놓칠까, 이치마츠는 목소리 높여 외쳤다. 야, 나 놓치지 마. 나 여기 있어. 뒤를 돌아서 카라마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벌써부터 굴뚝같았다. 안 돼, 뒤 돌아보면 안 돼. 주문처럼 스스로에게 외며 그는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카라마츠가 언제든지 따라잡을 수 있도록. 따라오고 있다는 카라마츠의 목소리는 들렸으나, 그의 위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먼지 가까운지, 그의 뒤인지 아닌지.

    그나마 동굴을 벗어나 좁은 길을 향하자 낫다고 느꼈다. 다시금 어두컴컴한 암흑이 앞을 집어삼켰지만 적어도 발소리가 확실히 들렸다. 어차피 뒤를 돌아봐도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 똑같을 테니 돌아보고픈 욕구가 덜한 것도 있었다. 고요히 두 쌍의 발걸음만 울리는 공백을 채우고 싶어, 이치마츠는 쉼 없이 떠들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말을 한 적이 없을 것 같았다. 야, 넌 무슨 확신으로 내가 올 거라고 마냥 기다리고 있었냐. 안 무서웠어? 길은 지지리도 못 찾으면서 또 여기까진 어떻게 잘 갔네. 내가 그 날 나가지 말랬잖아. 근데 넌 굳이 나가서, 그래서……. 수많은 단어들이 이치마츠의 입술을 떠났지만 정작 그 중에 하고싶은 말은 하나도 없었다. 미안해, 고마워. 아무런 이유 없이 널 데리러 온 건 아니야. 네가 널 사랑해서. 너 없으면 못 살아서. 날 좋아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살아가는 게 보고 싶어. 죽다 살아나도 여전히 못 내뱉을 말들. 이치마츠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카라마츠가 내내 답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 야, 대답 안 하냐."

    발걸음을 멈춘다. 동굴에 메아리치는 발걸음은 마치 그 뒤에 군대가 걷고 있었던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의 뒤에 카라마츠가 있는지, 다른 누군가가 서 있는지, 두 명이 있는지 열 명이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쓰렉마츠! 아니, 카라마츠! 그가 목이 터져라 외쳐도 카라마츠는 답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앞으로 내딛고 뒤따라오는 발걸음에 귀를 기울였지만, 메아리인지 카라마츠의 발걸음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가 길을 잃은 게 분명했다. 이 암흑 속에서, 이치마츠를 놓치고 저 어둠 속을 떠돌고 있는 게 궁금했다. 길도 잘 잃어버리면서.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하데스의 조건이 그의 몸을 굳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카라마츠가. 결국 카라마츠가 없다면 무슨 의미지? 그는 몸을 비틀었다.

    신기하게도, 암흑 속이었지만 카라마츠만은 터널 속 빛처럼 또렷이 보였다. 서로를 향해 뻗은 손은 닿지 못하고 멀어진다. 자신의 발아래 땅이 무너지는 걸 느끼며, 이치마츠는 숨을 삼켰다. 카라마츠! 그의 외침마저 그와 함께 저 깊은 암혹 속으로 빠져들었다.




    바다에 담가진 듯 몸은 땀에 푹 절여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치마츠는 눈을 떴다. 시커먼 암흑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으나 점차 어둠 속에서 익숙한 천장이 자리를 잡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는 자신이 잠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옆에 형제들이 곤히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었고, 창밖은 고요했다. 호흡을 고르며 가만히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총 다섯 개의 숨소리가 들렸다. 다섯 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그와 제일 가까이 누워 있는 사람의 윤곽은 유독 짙었다. 진한 눈썹과 순한 표정, 살짝 벌려진 입……. 이치마츠의 심장이 다시금 크게 뛰었다. 카라마츠! 카라마츠!

    어쩌면 모든 게 꿈일지도 몰랐다. 카라마츠의 죽음도, 여신도, 하데스도, 다용도, 그의 여행도. 그는 끔찍한 악몽을 꾼 것 뿐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모든게 말이 되지 않았다. 숨을 푹 내쉬고 다시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카라마츠가 몸을 뒤척였다. 이치마츠를 향해 눕고서, 느리게 눈을 뜬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노곤한 미소를 지었다.

    "이치마츠, 잠이 안 오나?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됐거든."

    퉁명스러운 한 마디를 하고 제 형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찰나, 이치마츠의 몸이 굳었다. 시선이 카라마츠의 가슴에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그의 귀에 울렸다. 이치마츠, 왜 그러나? 의아한 목소리는 창 밖에서 나는 듯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몸이 얕게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카라마츠의 가슴에 각인된 숫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제 값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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