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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치카라]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완)

[돈마피/돈히라]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 下

W. 치누





    오늘은 이상하게 운이 좋다, 고 회사원 마츠노 카라마츠는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남의 일까지 이것저것 떠안아 밤을 새면서 잔업을 하고 있을 텐데 무슨 변덕인지 오늘만큼은 야근도 없이, 회식도 없이 정각 6시에 일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일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만한 일이 일어나니 되레 불안하다. 집에 가서 빨래를 돌리고, 청소도 좀 하고, 오랜만에 직접 저녁도 요리해서 먹고... 다른 사람이라면 평범한 저녁의 일과들이 새삼 생소하게 느껴진다. 일찍 끝난 김에 마트도 가서 장이라도 볼까, 야채 같은 건 쉽게 상하니 사두지 못하겠지만 냉동식품이라면, 같은 욕심까지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빌려주셨던 코트도, 카라마츠 씨에게 돌려 드려야 하는데. 차마 호텔리어에겐 맡기고 갈 수 없어 회사까지 가지고 온 코트를 팔위에 구겨지지 않게 걸치며 그는 어디서 카라마츠를 찾을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돈에게 주면 되려나? 그러나 부서를 벗어나 복도로 발을 디딘 순간 그의 시야를 덮치는 푸른색 와이셔츠에 아, 역시 그러면 그렇지, 들리지 않을 한탄을 내뱉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오늘 하루 동안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평화로운 저녁 따위를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Buonasera, 마츠노! 오늘은 일찍 퇴근하는건가?"

    "아, 카라마츠 씨..."

    오늘도 또 돈이 바쁘신가요? 라고 입술을 달싹여 질문을 물어보기 전에, 창문 밖으로 바람에 펄럭이는 흰 정장이 보인다. 멀리서 봐도 절대로 다른 누군가로 오해할 수 없는 백정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꽃을 들고 서 있었고, 역시나 오매불망 출입구만을 바라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자신을 보낸 건가, 싶었지만 굳이, 라는 의문이 먼저 떠오른다. 이치마츠는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재촉하지도 않고, 밀어붙이지도 않고, 그저 기다리는 사람. 자신같이 한없이 느리고 불안한 사람마저도 기약 없이 기다려주는 사람. 굳이 카라마츠를 시켜서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시키는 건, 이치마츠답지 않았다. 그런 마츠노의 생각을 읽은 듯, 카라마츠는 평소의 당당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어깨에 팔을 가볍게 걸쳤다. 키는 비슷하더라도 덩치도, 근육의 양도 확연히 차이 나는 사람이 기대자 의도치 않게 몸이 기웃뚱, 휘어진다. 그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카라마츠의 손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분명 넘어졌으리라. 이건 돌려받겠다, 라는 말과 함께 쥐고 있던 카라마츠의 코트가 마츠노의 손에서 떠나간다.

    "아, 밖의 돈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지! 오늘은 돈이 아니라 나와 함께 보내는 거다! 우리는 선약한 술자리도 있지 않나."

    술자리, 라면 어젯밤에 한 말을 뜻하는 것인가, 마츠노는 회상한다. 그저 농담으로 생각하고 넘겼는데 의외로 진담이었나 보다. 하지만 막 6시를 넘긴 시간부터 술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르지 않나, 싶기도 하였다. 매일 이 회사로 출근했던 것처럼 능숙하게 앞문 대신 뒷문으로의 길을 이끄는 카라마츠를 보며 그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선뜻하고 활기찬 말투와는 다르게 어깨에 걸쳐진 손은 시체처럼 늘어지는 듯 했다. 답지 않게 늘 말끔하게 빗질 되어있었던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잔머리가 일어나 있었고, 시선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무엇보다 늘 돈을 우선시하던 그가 돈을 뒷전으로 미루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좋은 감으로 카라마츠를 관찰하고 있던 마츠노가 차마 알아차리지 못한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카라마츠 역시 마츠노를 관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신경 쓰이는 듯 자꾸 밖을 힐끔힐끔 보면서도 카라마츠의 팔은 뿌리치지 않는다. 돌려받은 코트의 무게를 어림잡아 보니 넣어둔 총은 여전히 잘 보관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질문이 한두 개쯤은 나올 만도 한데 조용하다. 안 하는 것일까, 못 하는 것일까, 쓸 데 없는 궁금증을 머릿속에서 굴리며 카라마츠는 마츠노를 어젯밤 데려갔던 호텔로 다시금 이끌었다. 당연하다는 태도로 벨 보이에게 방을 안내받고서, 결국에 다다른 스위트룸 안으로 편안히 들어간다. 어젯밤, 마츠노가 묵었던 곳과 똑같은, 한 벽면으로 야경이 온전히 보이는 방이었다. 오후의 일본은 밤만큼 반짝거리지 않군, 아쉬움을 입에 머금고서 카라마츠는 시선을 밖으로 고정한다. 뒤에서 불규칙적으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색하게, 발 놓을 곳을 정하지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을 마츠노가 절로 상상되어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일부러 몇 초 더 경치를 구경하다가, 뒤늦게 몸을 돌렸다.

    "무슨 술 좋아하나, 마츠노? 맥주? 일본인들은 사키를 마신댔나? 하지만 남자라면 역시 위스키나 진이지, 안 그러나!"

    전 괜찮습니다, 어물쩍 들려오는 대답을 무시하고서 카라마츠는 냉장고에 미리 넣어둔 보드카를 꺼냈다. 손바닥을 차갑게 식히는 유리병을 옅게 흔들어 보고서, 이내 능숙하게 텀블러에 술을 따른다. 호텔리어가 주문에 따라 깔끔하게 손질하고 잘라놓은 과일 플레이트와 함께 쟁반 위에 올려놓고 카라마츠는 그 모든 것을 침대 위에 내려놨다. 이후 그 옆에 앉으라고 마츠노에게 손짓하고서, 그는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카라마츠 씨, 저는 정말 괜찮은데..."

    "취하는 게 좋을걸, 마츠노. 마츠노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잠시 숨을 멈췄을까, 정적이 목에 걸렸다가 이내 내려간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쨍그랑, 포크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래,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기 전에 무언가를 먹는 게 좋긴 하겠지. 마츠노에게서 되돌려 받았을 때 대충 어깨에 걸친 코트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유리잔이 쟁반과 달칵, 맞물리는 소리가 난 후에야 그는 나직한 질문을 하나 건네 보았다.

    "합법적으로 살인하는 방법을 아는가, 마츠노?"

    쿨럭, 기침소리가 들렸다.

    "합법적으로 살인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전쟁 중에 적을 죽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죽이는 거지. 죽음이 최고의 형벌인 세상에서, 이미 죽어버린 인간에게 내릴 수 없는 벌은 없으니까 말이다. 법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니 굳이 따지면 범법적인 행위도 아니야."

    몇몇은 이걸 궤변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카라마츠는 중얼거리고서 숨을 골랐다. 굳이 보지 않아도 마츠노는 토끼처럼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고 있겠지. 지나치게 놀린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하며 카라마츠는 고개를 반쯤 돌려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취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잖나, 마츠노. 진즉에 내 말을 듣고서 보드카를 다 마셔버렸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오, 두려워하고 있나, il mio gattino? 걱정 하지 마라! 난 당신을 죽일 마음이 추호도 없으니까 말이지."

    당신을 죽이면 돈이 날 미워할 테니까, 뒷말은 소리소문 없이 삼켜진다. 반쯤 빈 유리잔이 괜히 거슬려, 어쩌면 아이 같은 심술로 보드카를 집어 아슬아슬하게 출렁거릴 때까지 술을 다시 채워주었다. 아, 작은 탄식이 귓가에서 울린다. 원래부터 술에 약한 마츠노는 이 잔을 비우기 전에 분명 거나하게 취하여 쓰러지게 되리라.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말이지 마츠노, 나는 당신에게 아주 많은 자비를 베풀고 있어. 내가 얼마나 상냥하게 행동해주고 있는지 안다면 당신은 눈물을 흘릴 텐데!

    "있잖나, 마츠노. 나는 정말로 많은 생각을 했어."

    당신을 죽이는 수십 가지 상상을. 코트 안에 든 총으로, 오소마츠가 건네준 독약으로, 또는 내 손으로 직접.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서 바다에 빠트리는 상상도 하고, 맷돌을 던져 살해하는 상상도 하고 악마에게 바치듯 불태워 죽이는 것까지.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 같았노라 카라마츠는 회상한다. 싸늘한 시체 앞에 서 있는 이치마츠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카라마츠, 자기 자신으로. 실제로 마츠노를 죽인다면 이치마츠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로서는 도통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이미 숨이 떠나간 육체를 붙잡고서 오열할까? 순수한 증오만을 담은 눈으로 날 바라볼까? 저승길이 외로울까 걱정하여 저승길까지 쫓아갈까.

    했던 수많은 상상 중 하나처럼,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그 무게를 느꼈다. 마츠노를 바라보지 않고서 술을 더 마시라고 손짓을 했다. 쭈뼛쭈뼛, 잔이 비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힐끔, 훔쳐본 그는 이미 이성을 반쯤 놓고서 무슨 일이 돌아가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당신은 마지막까지 그저 피해자로, 무고한 희생자로 남아. 이 모든 걸 술로 인해 얼룩진 흐릿한 기억으로 남겨. 그러기에 당신은 더욱 괴로울 거야. 애매하게 기억하고 늘 의심과 불안에 시달리면서. 총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짧은 문자를 하나 전송했다. 앞으로, 5분. 스스로를 타이른다.

    "내가 다다른 결론은, 결국에는 이거였지만."

    능숙하게 총에 소음기를 부착하고 관자놀이에 겨눈다. 가다올 죽음에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몸이 덜덜, 떨렸다.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행복이었다. 그렇게도 바라던 실연의 순간에 관한,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게 될 복수에 관한. 총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꾸욱, 주어 진정시켰다. 우당탕,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진 듯 마츠노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공포에 질려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그는 외쳤다. 하지, 마. 안 돼. 그만둬.

    "있잖나, 마츠노,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랑한다는 말이 사형선고가 될 수 있는지 몰랐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나의 죄는 무엇이지? 어째서 나는 사형을 선고받은 거지?"

    입술을 찢듯 벌어지는 미소와는 달리 목소리는 처참하게도 암울하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서, 그는 자신만의 독백을 이어갔다.

    "이 모든 것에 당신의 잘못은 없어. 오히려 최대의 피해자이지! 하지만 나는 그래도, 당신이 죄책감을 가졌으면 한다. 나는 당신 때문에 죽는 거야, 마츠노. 돈에게 사랑을 받아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서."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니까, 분명 그래 줄 거지? 카라마츠는 읊조렸다. 아아, 이 얼마나 완벽한 결말인가! 카라마츠는 마츠노를 죽이지 않았다. 마츠노를 억지로 이치마츠와 떼어놓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츠노가 이치마츠에게 이별을 선고한다면 그것은 오롯이 마츠노의 선택일 것이며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츠노가 이치마츠를 받아들인다면 그것 또한 그의 선택이었다. 그것이면 되는 것이었다.

    왜, 입을 뻐끔거리는 마츠노가 보인다. 왜냐고? 어째서 이치마츠를 위해서 포기해주지 못하고, 무고한 희생양을 봐서라도 눈감아주지 못하냐고? 카라마츠의 안에서 조소가 올라왔다. 그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나, 오소마츠가 독약을 쥐여준 후에, 어느 순간부터 그는 되묻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카라마츠는 왜 참아야 하는가? 안에서 끓어오르는 고통을, 설움을, 질투를 그저 삭히고만 있어야 하는가? 자신의 것을 빼앗겨버린 아이의 울분은 어디로 토하면 되는 것인가. 왜 그는 되고 나는 안 되는데?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 나는 너를 이만큼이나 사랑하는데. 그러니까 이만큼의 복수만큼은 투정으로 받아주길. 이치마츠, 너의 행복만을 바랐던 나이지만 한 번만큼은 너도 나만큼의 고통을 느껴보길.

    "기억해, Gattino. 여기에 가해자는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살인이니까 말이야! 자 그럼, ciao, 마츠노! "

    마지막, 단 하나의 후회가 있다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 이치마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카라마츠는 생각했다. 쾅, 총성 대신 문이 부셔질듯 열리는 소리가 호텔을 울린다. 만개한 장미의 흩날리는 꽃잎처럼 핏방울이 방울방울 흩뿌려진다. 흐려진 시야 안으로 힐끗, 지나가는 흰 구두에,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에, 코를 스치는 매캐한 화약 냄새에 둥그런 미소가 그려진다.

    안녕, 돈. 사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