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 약 1여년 전쯤에 쓴 글들의 후편을 적어 왔습니다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 上: https://chinuu.tistory.com/9?category=696863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 中: https://chinuu.tistory.com/10?category=696863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 下: https://chinuu.tistory.com/11?category=696863
위 편들을 읽어야 아래 내용에 개연성이 생깁니다.
[돈마피/돈히라]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 下
W. 치누 오늘은 이상하게 운이 좋다, 고 회사원 마츠노 카라마츠는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남의 일까지 이것저것 떠안아 밤을 새면서 잔업을 하고 있을 텐데 무슨 변덕인지 오늘만큼은 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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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마피/돈히라]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 中
W. 치누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안쓰러운 마피아 씨?" "아아... 완벽하게 패배해 버렸다. 반박의 여지도 없이." 이야, 안타깝기까지 하네 ― 라며,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 듯 태평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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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마피/돈히라] 장미와 피는 둘 다 붉다 上
W. 치누 때는 가을이 막 여름을 집어삼킨 참이라, 남색 하늘 위 달은 온기 한 점도 내어주지 않았고 뺨을 스치는 공기는 애매하게 미지근했다. 이미 밤이라고 칭하기에도 민망한 늦은 시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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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BGM: https://www.youtube.com/watch?v=2QT5eGHCJdE
매캐한 화약의 냄새가 넓은 호텔의 방을 가득히 채웠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부유하던 연기는 좁고 어두운 곳에 숨고 싶은지 이치마츠의 안으로 파고들어 그의 폐를 찌른다. 이치마츠가 제아무리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하더라도 이 끔찍한 향을 온전히 제 안에 담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이치마츠는 첫 숨에 호흡을 멈췄다. 제 좁고 이기적이며, 뒤틀리고 일그러진 품 안에나마 제 죗값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담겠다는 듯이. 그는 방 안으로 발걸음을 들여놓지 못했다. 문지방의 반대편에 서서 무심하고, 냉정하고, 고통받는 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그의 양옆으로 부하들이 물밀듯 들어와 반은 카라마츠의 시신을 수습하고, 나머지는 가냘프고 메마른 회사원을 부축하여 그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시커먼 양복이 시야를 얼룩지는 가운데에 보이는 건 꽃잎같이 벽을 장식한 핏자국밖에 없어서, 그 사이에 홀로 흰 셔츠를 걸치고 속을 게워내듯 고꾸라져 있는 마츠노는 이질적이게 보여서, 이치마츠는 소리 없는 오열처럼 참았던 숨을 내뱉는다. 몇 분 전, 카라마츠에게서 단 한 글자의 문자를 받았을 때부터 느꼈던 불길함이 몸집을 얻고서 그를 깔아 뭉개려고 하고 있었다. 242호, 별다른 안부도 첨언도 없이 보내진 문자가 시사하는 바는 호텔의 어느 방, 딱 그만큼이었지만 이치마츠는 비극을 그 안에서 읽어냈다. 피로 얼룩진 길을 걸어온 남자는 죽음의 향기에 예민했다.
부하 한 명이 그의 곁에 다가와 가벼운 묵례를 했다. 깨끗한 발음의 목소리를 낮게 깔고서, 그는 나직하게 보고를 시작했다. 돈, 카포레짐 카라마츠는 사망하셨습니다. 마츠노 씨는 근처의 다른 호텔 방에서 안정을 취하시고 있습니다. 의사를 불렀으니…. 중저음의 목소리가 끔찍하게도 듣기 싫었다. 카라마츠가, 죽은 카라마츠는 억지로 목소리를 그렇게 깔곤 하였다. 이젠 그 짜증나는 허세도 듣지 않아도 되겠지! 기묘한 해방감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닥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남자는 천천히 바닥의 시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널브러진 시체의 손에는 여전히 총이 들려 있었다. 초점 없이 멍하니 떠진 파란 눈은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침대에서 걷어낸 흰 이불을 그 위로 덮으려는 걸 잠시 제지하고서, 이치마츠는 놀랍도록 상냥하게 총을 빼내고 감기지 못한 눈 위로 손을 덮었다. 아직 사후경직이 일어나지 않아 부드럽고, 온기가 식지 않아 따스한 몸뚱이는 그 아래 피가 흐르지 않음에도, 맥박이 뛰지 않음에도 카라마츠가 아직 살아있단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이제 눈을 뜨고서 웃을 것이다. 속았나, 돈? 감쪽같았지! 이걸로 내 소중함을 좀 알았으면 한다. 결국, 내가 죽으면 슬퍼할 거면서 말이다. 바닥을 내리치려는 듯 높게 손을 치켜들었다가, 이내 천천히 손을 내려 죽은 이의 뺨을 쓰다듬는다. 네가 살아있을 적 내가 널 이리 다정하게 대했더라면 넌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분명 넌 나에게 자주 웃어주었을 터인데, 이상하게 그 모든 기억이 흐릿했다. 하지만 난 살아있는 너에게 결코 다정해지지 못한다. 너는 나의 지옥이었으므로.
"…카라마츠."
미안해. 이제 만족해? 행복해 보이네. 팔자 좋게 누워선, 어서 일어나지 못해? 카라마츠, 나의 카라마츠, 나의 것이었던 카라마츠. 온갖 원망과 후회와 비통함이 섞여 입 밖으로 꺼내기엔 지나치게 큰 부피가 되었다.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게워내 면밀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는 입을 도로 닫았다. 지나치게 자세히 속을 헤집으면, 그 속에 일말의 기쁨이 있으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그의 목을 비튼 탓이었다. 날 괴롭히는 죄책감은 널 이리 내몰았다는 죄책감이 아니라 네 죽음에 후련함을 느낀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이면 어떡하지. 이 원망은 너의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너의 죽음으로 인한 온갖 책임과 불유쾌한 뒤처리들에 대한 것이면 어떡하지.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옹졸하며 보잘것없는 인간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치마츠는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끔찍하고 애매하며 끈적이는 불쾌함의 덩어리로서 자신의 내장을 짓누르고 긁어놓는 편이 나았다. 이치마츠는 답 없는 카라마츠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하염없이 그의 이름만을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느껴지는 건 점점 더 싸늘하게, 딱딱하게 굳어가는 카라마츠의 몸뿐이었다. 이치마츠는 이내 얼얼해진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체, 잘 처리해. 장례식은 이탈리아에서 치른다. 짤막한 명령만을 던지고서 이치마츠는 마츠노를 향해 움직였다. 부하의, 한 사람의,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은 없었다.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마츠노는 조금 전의 호텔 방과 비슷한 장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얇은 몸선을 어떻게든 가리려는 듯 이불을 둘둘 두르고 손에는 물잔을 쥔 그는 유독 안색이 새파래 보였다. 자기네들의 우두머리가 방 안으로 발걸음을 디디자 부하들은 말없이 예를 차리고 자리를 비킨다. 이내 넓은 공간 안에 단 두 명만이 숨 쉬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죽음과 비극을 끌고 온 것인지, 이상하게도 공기가 비릿하다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자주 그랬던 것처럼 마츠노의 옆자리에 앉기보단, 이치마츠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그를 마주 보고 앉기를 선택했다. 새카만 눈이 그를 힐끗, 향하고 다시 바닥을 향해 떨구어진다. 물잔 속 물이 조금 더 심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인사치레처럼 물어보려다가 이내 삼켰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일반인은 괜찮지 않다. 이치마츠조차 익숙해지는데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 조심스럽게 단어를 갈무리하고 거른다. 이치마츠는 자신의 부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어. 자의이든, 타의이든. 남을 죽일 거면 죽을 각오도 해야지. 기억하면 힘들어지는 건 너뿐이야. 그러나 마츠노에게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일반인은 소중한 이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들을 기렸고, 고통받더라도 언젠가 숭고한 과거의 추억으로 빚어냈다. 잊는 법만을 배운 이치마츠는 기억하는 법을 몰랐다. 기억하는 사람에게 건네야 할 말도 몰랐다. 그래서, 카라마츠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불렀다.
"Gattina."
"돈, 카라마츠 씨는…. 카라마츠 씨는," 희게 튼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숨이 막히는 듯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마츠노는 기어코 질문했다. "정말…. 정말, 죽은 건가요."
질문이 아니었다. 마츠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희망을 놓지 못한다. 자기 안에서 이미 결론을 내렸으면서. 이치마츠는 짧게, 아주 짧게 거짓말을 고민했다. 그는 죽지 않았노라고, 이건 거대한 연극이었다고. 마츠노라면 기꺼이 속을지도 몰랐다. 입안에 거짓된 환상을 달콤한 사탕처럼 물고 있으면 혀에 묻은 피의 쇠 맛도 묻힐지 몰랐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를 끝까지 읽은 사람에게서 책을 빼앗아 마지막 장을 찢는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작게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충격이 흘러넘쳐 남자의 눈을 비집고 나온다. 입을 틀어막은 손 위로 눈물이 둥글게 고였다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추락한다. 이치마츠는 마츠노의 몸에서 떨림이 잦기를 기다렸다. 머리에 언제나 눌러 쓰던 모자를 벗고서 그 속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문득, 이 모자가 참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가 되었을 때 받았던 모자. 원래 한 조직의 보스는 그에 걸맞은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모자까지 쓰지 않으면 완전한 복식을 지닌 게 아니라고 우기면서 모자를 건네주던 미소는 참 환했더라지. 그 빛은 제 심장을 까맣게 그슬리게 했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끝끝내 모자를 버리지 못했다. 진즉에 버렸어야 했던 것을. 버릴 수 없다면, 닿지 않는 곳에, 보이지 않는 곳에 뒀어야 했는데. 하지만 보아라, 그는 지금조차 모자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페도라를 다시 제 머리에 씌웠다. 적당히 그늘진 시야가 그에겐 편했다.
"내일 회사는 병가 내는 게 좋겠네. 한 달쯤 유급휴가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할게. 마음 같아서는 곁에 머물면서 도와주고 싶지만…. 이제 마피아와 관련된 것이라면 지긋지긋하겠지."
말 안 해도 알아. 그러니 네 입으로 들을 바에야 직접 말하는 게 나아. 괴롭힐 것이라면 자신만 괴롭히지, 마츠노는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상황조차 그를 사랑한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알기에,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탓하지 못했다. 카라마츠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심술처럼 그를 곁에 두고 마츠노와 어울린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다. 그의 고통을 비웃고, 그의 눈물을 무시하며. 그를 증오하면서도 차마 끊어내지 못한 자신만이 오롯이 심판받아야 했으나, 혼자 죄를 짊어지지 못하는 것조차 그의 벌의 일부였다. 이치마츠는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 사이에 의심과 불확신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일반인인 gattina에겐 힘들겠지만, 우리는 잊는 게 좋을거야. 아예 우리를 만난 적도 없었다는 듯이. 이건 그냥 지독한 악몽이었다고 생각해. Gattina는 그럴 자격이 있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이건 모두 내 탓이야. 일상으로 돌아가. 애초에 나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부하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비행기 일정 잡아. 아카츠카 패밀리에게 인사는 해야 하니 내일 걸로.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명령에 부하는 깍듯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빠르게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애초에 일본에 너무 오래 있었어. 원래 이렇게 오래 있을 게 아니었는데, 마츠노를 만나고…. 어느 새벽, 달을 바라보던 비쩍 마른 회사원이 어제 본 것처럼 생생히 눈앞에 그려진다. 그때는 운명이라 생각했던 만남이, 이제는 지독한 신의 장난이었을까, 하는 의문으로 탈바꿈했다. 그에게 끌리지 않는 건 불가능했으니, 애초에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다른 길로 걸었더라면, 시간을 조금 더 일찍 혹은 늦게 나왔더라면. 카라마츠, 너는 이런 생각을 했을까? 운명을 질문하고, 이내 현재 서 있는 곳 외에는 발 디딜 미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아득한 절망 속에서 헤엄쳤을까. 카라마츠가 살아있을 땐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그가 죽은 지금, 목소리를 내어 질문을 던지더라도 되돌아오는 답은 고요뿐이었다.
방 안에는 옅은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차마 폐 가득히 숨을 채울 수 없는 사람들의 헐떡임이었다. 눈앞에서 죽음을 목도하고 살기 위해 제일 기본적인 발버둥조차 죄스러워 마음껏 날숨을 내뱉지 못하는 인간들의 울음소리였다. 적어도 자신이 나갈 때까진 이 상태가 계속되겠지 싶어 이치마츠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쉬고 가, 필요한 게 있다면 부하들을 밖에 대기시켜 놓을 테니 편하게 부르고. 짤막한 인사만을 남기고 떠나려는 그를 붙잡은 건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었다. 금방이라도 놓을 것처럼 약하게, 그러나 절박하게 이치마츠의 정장 끝을 붙잡은 손은 그가 느끼기에 납처럼 무거웠다. 차마 품어서는 안 되는 희망을 품게 했다.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허락을 구하게끔 하였다. 한참 울어 눈가가 붉어졌지만, 마츠노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다. 시린 겨울 하늘처럼 깨끗했으며 투명한 호수처럼 그 속이 그대로 드러났다. 카라마츠는? 카라마츠의 눈은 어땠더라. 요즘 자신을 바라보던 푸른 시선은 죄다 새카만 선글라스에 막혀 있어서, 기억은 선뜻 수면 위로 떠 오르지 못했다.
"돈, 카라마츠 씨는 왜…. 죽어야 했던 겁니까. 카라마츠 씨는, 카라마츠 씨는….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대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 흡, 않았지만…."
목소리가 메마른 대지처럼 갈라지고 안으로 무너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츠노는 말을 이어나갔다. 탈출할 수 없는 재해에서 어떻게든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결국 제 두 다리가 아래서 부러지고 자신은 넘어져 욕심 많은 땅속에 삼켜질 운명이란 걸 알면서도.
"그래도…. 그래도,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좋은 사람? 그 자식이? 그래, 좋은 사람이었지. 차라리 사람이 덜 좋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텐데. 차라리, 차라리…!"
목소리에 조소가 한껏 섞여 천장을 찌를 듯 올라가다, 이내 김빠진 듯 도로 가라앉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마츠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언제나 제 앞에선 상냥함만을 내비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흉물스럽고 뒤틀린 속내를 드러낸다면 그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이치마츠의 비웃음은 마츠노를 향한 게 아니었다. 역겨움도, 끔찍함도, 증오도 오직 그 자신만을 찔렀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며 감정을 정리하던 이치마츠는, 이내 다시 의자에 앉았다. 두 손을 깍지 껴 자신의 앞에 단정하게 정리하고서, 그는 숨을 고른다.
"Gattina,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조금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몰라. 이건…. 이건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죄이자, 마지막 선물이 될 거야. 당신에게 이런 일을 겪게 만들고서, 좋은 사람인 척할 수 없다는 나의 죄책감이자…. 혼란스러울 당신이 조금이나마 당신 탓은 없다는 걸, 이 모든 건 내가 짊어져야 하는 죄라는 걸 깨닫기 바라는 마음이야."
이치마츠는 눈을 감는다. 그의 기억은 몇 년을 거슬러 오른다. 배가 부른 때가 없었던 과거로, 그러나 둘만 있다면 그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한때로.
카라마츠와 이치마츠가 만난 건 고아원에서였다. 둘 다 부모가 누구인지 기억을 못 할 정도로 어릴 때 버려져서, 그들의 세상은 낡아 빠진 나무 벽과 시큼한 냄새가 나는 옷들, 그리고 다리 뻗고 자 본 기억이 없는 침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 이치마츠는 또래 아이들과 잘 못 어울리는 성격이었고, 카라마츠는 또래 아이들에게 미움받는 성격이었다. 고아인 주제에 넌 뭐가 그리 당당해? 고아인 주제에, 왜 그리 희망을 품은 거야. 너도 우리랑 똑같으면서 우리랑 다른 척하지 마. 결국, 너도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처럼. 그렇게 겉도는 두 사람은 서로를 찾아 그들만의 가족을 이루었다. 같이 뒷골목을 걸어 다니고, 시시콜콜한 잡동사니들을 주워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운 좋게 책이라도 얻는다면 밤을 세서 읽었다. 서로를 향해 웅크려 누워선 상상도 되지 않는 미래에 대해 속삭였고 그 미래 속에서 둘은 언제나 함께였다. 갈라진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어 몸이 달달 떨리는 겨울날이더라도, 이런 순간만큼은 마냥 좋았다.
고아원은 말이 좋아 고아원이지, 두 소년은 실상 길거리에서 자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식탁 위에 음식이 올라간 기억은 없다. 십 몇명의 아이들은 다들 구걸하거나, 빼앗으며 굶주린 배를 채웠다. 빼앗기거나 동냥할 능력도 없는 아이들은 텅 빈 위장이 꾸르륵거리는 소리만을 들으며 밤에 잠을 청할 뿐이었다. 이탈리아 슬럼가에 위치한 고아원 따위에 신경을 쓰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허구한 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게 일상이었고 낡은 집들은 도둑이 두려워, 혹은 그보다 더한 강도가 무서워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궜다. 범죄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그릇됨을 모르는 아이들은 미래의 범죄자로 자라났고, 나머지는 굶어 죽었다. 혹독한 세상이었다. 그런 세계에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그리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에게 기댔다. 둘은 종종 한 약속을 되새김질하곤 하였다. 우리는 가족이야. 언제나 함께하자. 그 약속을 읊고 웃는 사람은 이치마츠보단 카라마츠였지만, 나직한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일 때마다 이치마츠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렇게 두 소년은 그 누구의 눈길도 닿지 못하는 그림자 속에서 서로를 더듬으며 살아갔다.
이치마츠는 그날을 생생히 회상했다. 가을과 겨울이 겹쳐지는 계절이었다. 허기는 졌으나 이젠 몰래 따 먹을 사과도 없어 세상이 야박하게 느껴지는 하루하루였다. 학교도 다니지 못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소년들에게 고아원 원장의 기이한 행동들은 빈 배 대신 반짝 솟아나는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좋은 구경거리였다. 늦은 밤마다 어디로 나가, 양손 가득 무언가 담긴 가방들을 들고 돌아온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그 가방들을 품에 안아 들고 고아원 밖으로 나섰다. 그는 그 누구도 데려가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그 가방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불법으로 유통되는 마약이나 남몰래 밀매되는 무기, 둘 중 하나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세탁되기 전의 돈들을 잠시 보관해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고아원의 아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인신매매는 아닌 게 다행이다 싶었다. 이곳에서는 그딴 범죄가 전혀 누가 되지 않았고, 살아남으려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이치마츠는 원장이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원장의 태도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게 굴었고 방치하던 아이들을 쫓아낼 듯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도 비가 새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이 고아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적어도 머리 위에 지붕이 있었고, 어린아이에게 '돌아갈 곳'이라는 소속감은 생각보다 강한 힘을 발휘했다. 유명무실한 원장이라도 없었다면 근처를 배회하는 비행 청소년들과 노숙자들에게 빼앗길 게 뻔한 작고 좁은 터전이 이치마츠와 카라마츠에겐 집이었다. 그래서 결국 어느 날 밤 원장이 그의 잦은 외출을 하려고 할 때, 하필 목이 말라 부엌으로 내려온 이치마츠와 마주쳤을 때, 이치마츠의 흔들리던 시선은 그의 등에 짊어진 가방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물건을 조달하던 가방과는 다르다. 그 끝까지 꽉꽉 채워진 짐가방이 뜻하는 건 이별이요 야반도주였다. 평소였다면 눈을 적당히 내리고 모른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들의 집이었다. 카라마츠가 살고, 웃으며, 돌아오는 장소. 정말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면? 운 좋게 마음씨 착한 어른이 거두어 준다던가, 그런 건 기대할 수 없었다. 일을 하기에 그들은 너무 어렸고, 약탈하기엔 힘이 없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놓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원장을 붙잡았다.
"원장님, 어디 가세요? 늦은 밤에…."
귓가에 울린 목소리가 꼭 타인의 소유 같았다. 이치마츠의 성정을 얼추 알고 있던 원장은 그가 말을 걸자 당황한 듯했다. 단어를 뭉개며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서둘러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이치마츠는 자신이 나름대로 노력했다 생각했다. 이대로 보내줘도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아이고, 저 사람은 어른이고. 할 만큼 했어. 그의 마음과 달리 그의 몸은 원장의 옷깃을 잡아끌고 있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이치마츠의 머리를 치고 발버둥 치는 그를 떼어내려 악을 썼다. 그래도 이치마츠는 놓지 않았다. 머릿속을 누가 망치로 쿵, 쿵 두드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끈적끈적하고 따뜻한 액체가 뺨을 타고 내려와 그의 몇벌 없는 옷을 적신다. 이내 두꺼운 손가락이 이치마츠의 목을 감싸고 천천히 죈다. 이치마츠는 흐릿해져 가는 의식으로 생각했다. 이제 난 죽는구나. 카라마츠도 없이. 하지만 여기는 우리 집인걸. 카라마츠와 나의 집. 평소처럼 도망갔어야 했는데.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은 건 와장창,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였다. 이치마츠는 회상한다. 그건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깨지는 소리였으며, 그들의 결백함이 무너지는 소리였고 그들의 행복이 단절되는 소리였다고. 갑작스럽게 이치마츠의 목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고, 그는 콜록대는 소리를 내며 낡아 빠진 나무 바닥 위로 나동그라졌다. 원장은 무언가 끓는 소리를 내더니, 뒤로 휘청이다가 그대로 넘어졌다. 머리가 그대로 벽에 부딪히고 끌어내려지는 소리는 유쾌하지 못했다. 이치마츠의 얼룩진 시야 안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카라마츠가 보였다. 덜덜 떠는 몸과 손에 꼬옥 쥔, 끝이 깨진 유리병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명료하게 배반하였다.
"카, 쿨럭, 카라마츠…!"
"이치마츠! 괘, 괜찮나? 추워서 깼는데 네가 어, 없어서…. 찾으러 방을 나오니 네가 보여서…. 이치마츠, 이치마츠!"
동그랗게 떠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바닥에 쓰러진 몸은 미동이 없었다. 이대로 죽어버린 건가, 두 소년의 마음 속에 공포가 물밀듯 덮쳐왔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시체를 처리해야 하나. 원장이 마른 체격이었다 하여도 아이 두 명이 옮길 만한 덩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시체를 소리소문없이 처리할 기술도, 돈도, 지식도 없었다. 아침이 되면 더 많은 아이가 깰 것이다. 누군가는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트릴 것이고, 누군가는 '어른'을 찾으려고 뛰어다니겠지. 경찰이 올 테고, 그들은…. 이치마츠는 자신을 둘러싼 카라마츠의 팔에 좀 더 매달렸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집을 지키고 싶었다. 차라리 그저 모른 척, 원장을 보내주었더라면 좋았을까. 상상했던 것보다 열 배는 끔찍한 결과에, 그는 눈을 감았다.
앓는 소리와 함께 경첩에 걸쳐진 문이 열린다. 군용 단화를 신은 두 여인이 자연스럽게 낡은 고아원 안으로 스스로를 들였다. 세련되고 깔끔한 정장은 비루한 주변과 어울리지 않았다. 양갈래로 땋은 긴 갈색 머리카락이 동아줄처럼 흔들린다. 동행한 금발의 여인은 달콤한 초콜릿처럼 진한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다. 호박처럼 반짝이는 눈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고, 그 속에 담긴 날것 그대로의 기운이 시선을 피해버리도록 만들었다. 이치마츠는 그들이 위험한 사람이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머, 이게 뭐람? 돈나 오소코께서 살아있는 채로 가져오라 하셨는데, 이미 죽어버렸네? 앗, 다행이다~. 그냥 기절한 거였구나. 뇌진탕은 아니면 좋겠는데. 그럼 정보를 꺼내기 힘들어지잖아."
갈발의 여인은 툴툴거리는 어조로 시체를 살폈다. 놀란 티도 없이 자연스럽게 쓰러진 남자를 살피는 태도는 매정하게 보이기까지 하였다. 샛노란 시선은 곧바로 두 소년에게 향했다. 그들의 속에 파고들어 헤집는 눈길에서 이치마츠는 고개를 돌려 숨었다. 다시 눈을 마주했을 때, 여인은 붉게 칠해진 입술을 양옆으로 유쾌하게 찢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건네는 목소리에는 거리낌 없는 친근함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이건 애가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 저기, 이거 너네가 한 거야~? 대단하네!"
"쥬시코 언니, 이 인간 좀 들어줘. 나한테는 너무 무거워서 말이지…."
남자를 살펴보는 걸 끝낸 여인은 이내 금안의 여인에게, 그러니까 쥬시코의 주의를 빼앗아갔다. 그 빈자리를 자신의 시선으로 채우고서. 옅은 선홍빛 시선이 그들을 훑는다. 쥬시코의 시선에는 호기심만이 가득했다면 이 여인의 시선에는 계산이 가득했다. 목격자로서의 가치, 빼낼 수 있는 정보, 위협의 가능성. 이내 그들이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도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읏차, 가벼운 기합과 함께 쥬시코는 거뜬히 남자를 어깨에 쳐맸다. 붉은 피가 이마를 타고 머리카락을 적셨다가 바닥에 뚝, 뚝 떨어져 고인다. 그들은 떠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다시 손을 뻗었다.
"데, 데려가 주세요…."
"응? 와, 너희 말도 할 수 있었구나? 미안하지만, 그건 조금 무리일 것 같네! 애새끼들 돌보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오늘 있었던 일은, 알지?"
비밀로 해야 한다. 읊어지지 않은 뒷말이 들렸다. 어차피 꼬마 두 명에게 큰 관심을 표할 어른은 없었으니 실종사건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묻히겠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떨림은 멎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숨도 쉬지 못하고 이치마츠만을 껴안고 있었다. 그래, 애초에 이 밤이 시작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보금자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이미 무너져버렸으니 새것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기회는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원장님이 마피아의 물건을 빼돌린 거죠? 그것들을 어디 숨겼는지 알고 있어요. 좀 오래된 것들은 이미 팔아서 넘겼겠지만…. 제일 최근의 것들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두 여인의 차림새만으로 그들의 직업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 같이 사이좋게 굶어 죽는 이 마을에서 저런 정장을 입을 수 있는 건 피노 패밀리의 조직원뿐이었다. 물론 살인에 자연스러운 점이나, 돈나 오소코라는 그 유명한 이름을 댄 것만으로 그들의 정체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지만. 이 슬럼가의 비공식적인 주인은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렇다면, 마피아가 원장 같은 일반인을 찾는 경우는 몇 없었다. 원장의 요즘 태도와 그가 들고 오던 가방들을 생각해 볻다면 꾸준히 물건들을 빼돌리던 그가 발각된 것이겠지. 오늘 밤, 도망을 시도하였으나 운 나쁘게 이치마츠에게 붙잡히고 카라마츠가 그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갈발의 여인은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높게 추켜들고 두 고아를 바라보았다. 쥬시코는 팔꿈치로 여인의 옆구리를 은근슬쩍 찔렀다.
"얘, 토도코, 얘네들 쓸모 있을 것 같은데 데려가자~. 난 마음에 드는걸! 저 애 말이야, 영리한 것 같구. 유리병 보면 이 남자, 기절시킨 건 저 눈썹 짙은 애 작품 같고~. 둘 다 써먹을 만하지 않아?"
토도코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역시 탐탁치 않은데, 낮게 중얼거린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쥬시코 언니니까 동의하는 거야. 귀찮게 굴면 곧바로 버릴 테니까! 그 날, 원장을 만난 것은, 카라마츠가 그를 기절시킨 것은, 그리고 토도코와 쥬시코가 그들을 패밀리로 들인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고밖에 묘사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들이 누군가를 죽일 뻔했다는 사실 따위는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는 조직 내에서 잘 적응해 나갔다. 각자 여러가지 사정으로 모인 또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내일 먹을 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카라마츠는 특히 체격이 좋아 여러 잔심부름에 자주 불려 나갔고, 이치마츠는 주로 뒤에 남아 홀로 시간을 보냈다. 고아원 때보다 훨씬 더 안락한 환경이었지만 때로는 그들의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아 아쉬움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겠지. 이치마츠는 스스로를 달래는 데 익숙했다. 밤마다 서로를 마주 보고 누워 일상을 나누는 건 여전했고, 카라마츠의 미소는 여전히 따스했으며 서로를 붙잡은 손은 안전하다는 착각을 현실 위에 덧씌웠다.
그렇게 조직에서 일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모든 아이가 집합되었다. 15살 이하의 아이들은 큰 방에 옹기종기 모여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벽면의 문을 통해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조직에 오래 있었던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어투로 떠들어댔다. 드디어 보스가 차기 보스 후보들을 골라내는 거야. 이건 피노 패밀리의 오랜 전통이지.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건 엄청난 기회야. 보스가 될 기회!
"왜 우리 같은 어린애 중에서 뽑아?" 어느 아이가 물어보았다.
"그래야 돈나께서 손수 교육하니까 그렇지? 그것도 몰라?" 다른 아이가 당연하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무슨 기준으로 뽑는 건데?" 또 다른 질문이 아이들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나도 몰라! 돈나께선 돈나만의 기준이 있는 거야." 똑같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귀찮으니까 이제 물어보지 마!" 날카로운 명령에 아이들은 곧 삼삼오오 무리를 모여 수군대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치마츠의 곁을 지켰다. 큰 방의 구석을 차지하고서, 그들은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나 따위가 보스 후보가 될 리 없지. 자조적으로 웃는 이치마츠에게 카라마츠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다, 이치마츠. 이치마츠는 정말 똑똑하고 상냥하니까, 좋은 보스가 될 거라 생각한다. 카라마츠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아니지, 나보다는 네가 더 상냥하지. 그리고 카라마츠, 보스라는 자리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상적이고 멋진 자리가 아닐 거야. 마피아의 보스라니, 그 어느 자리보다 역겹고, 더러우며 끔찍하겠지. 너는 보스 후보가 되지 않을 거야. 아직도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햇빛처럼 찬란하게 웃으며 내일을 그려내는 너에게 그런 자리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 모든 말들을 제 안에 꼭꼭 눌러담아 숨겼다. 마피아의 보스에게 환상을 지닌 카라마츠를 굳이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이를 조금만 먹는다면, 그 동경은 알아서 녹아 사라지리라.
이치마츠,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옷자락에 눌어붙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카라마츠의 손끝을 떨쳐내고 이치마츠는 일어난다. 다른 숱한 아이들처럼 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책상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그 뒤에 오만한 미소를 짓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어깨쯤에서 정돈했고, 순한 눈매는 기묘하게도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새빨간 셔츠 위에 걸친 검은 정장 재킷은 망토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이치마츠는 저 여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돈나 오소코, 이 조직의 수장. 이치마츠가 허리 숙여 인사하자 그녀는 마음에 든 듯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오늘 본 애 중에 제일 예의가 바르네~. 어쩜! 가까이 와 볼래?"
붉은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끝을 따라 그는 주춤주춤,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여인의 껍데기는 상냥한 어른일지라도, 그 속에 담긴 게 그리 해가 없지 않다는 것쯤 그는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어두운 적색의 책상에 바짝 붙을 만큼 가까워지자, 오소코는 그의 뺨을 쥐고서 그의 눈을 깊게 바라보았다. 이내 아쉬운 듯 혀를 쯧, 차더니 여전히 웃는 상으로 그를 놓아준다.
"이름이 뭐라고 했니?"
"이치마츠라고 합니다."
"그래, 이치맛쨩~ 혹시 여자친구 있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치마츠는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침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린 건지, 기침은 꽤 오랫동안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게 뭐가 즐거운지 오소코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반응을 보니 아직인가 보네? 그럼 가족은? 아니면 친한 친구라도?"
"가족이라면…. 있어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쓸데없는 정보는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오소코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구나. 신기하네, 우리 조직 애들은 대부분 고아인데 말이야. 부모님도 조직원이시고?"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는 알 수 없었으나, 이치마츠는 성실히 대답했다. 어차피 거짓말을 해도 이 여인 앞에서는 다 들킬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뇨, 카라마츠 라고…. 저랑 같이 들어온…."
"이치맛쨩에게 카라마츠 군은 꽤 소중한 존재이겠네, 그럼? 가족이니까 말이야."
마지막 질문에 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여 답을 대신했다. 굳이 긍정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기에. 굳이 따지자면, 가족을 넘어선 소중함이었다. 카라마츠는 그의 집이자, 그의 가족이자, 그의… 눈앞에 다시 미소가 아른거려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소코는 이내 그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라마츠가 불려 나갔고, 그들은 같이 저녁을 먹으러 조직 건물 내 식당으로 향했다. 돈나 오소코가 얼마나 특이한 인물인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고, 언제나처럼 마주 보고 잠들었다. 그들 서로가 보스 후보가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둘 다 이런 평화가 깨어질 거라 예상치 못했다. 이 하루는 어린 그들의 기억에서 빠르게 묻혔다.
일주일이 흐르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불렀다. 모든 아이를 부른 건 아니었다. 저 애는 불렀지만, 이 애는 부르지 않았고, 그 애는 불렀지만 다른 애는 부르지 않았고, 카라마츠는 불렀지만 이치마츠는 부르지 않았다. 불린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다른 취급을 받았다. 좀 더 좋은 자리에서 먹고, 자고 교육을 받았지만 그만큼 더 냉정하게, 매몰차게 대하여 졌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또 다른 일주일이 흐르기도 전에 그중에서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카라마츠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는 이치마츠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많은 걸 배우고 있다. 총을 다루는 법, 조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조직이 배반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하지만 나에게 좀 어려워서 말이다, 이치마츠 너라면 훨씬 더 잘 알았을 텐데.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괜찮지 않은 걸 알았다. 카라마츠는 더는 웃지 않았다. 밤몰래 그들이 밀회할 때, 자신이 떠나고 나서 카라마츠가 흐느끼는 소리는 이치마츠의 꿈속까지 빈번히 따라왔다. 보스 후보는 많았지만 결국 차기 보스로 선택되는 건 한 명이었다. 조금이라도 그 확률을 높히기 위해 아이들은 서로를 짓밟고, 스스로를 불태운다. 차기 보스가 된다는 건 그만큼의 희생을 발아래 둔다는 걸 의미했다.
카라마츠가, 상냥한 카라마츠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오랜만이야, 이치맛쨩! 그동안 잘 지냈어?"
달갑게 그를 맞이하는 목소리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만을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오소코는 손을 깍지끼고 그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둥글게 휜 시선이 이치마츠를 감싼다. 이치마츠의 척추를 따라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런데도 그의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만 돌아갈까. 실례했다고 사과하고 그냥 가버릴까. 아직 늦지 않았다. 돌이킬 수 있었다. 지옥으로 발을 들이지 않아도, 그는 용서받을 수 있었다. 카라마츠는 강하다. 자신이 카라마츠를 대신해야 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카라마츠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 할 테니까.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끝날 때의 카라마츠는….
본 지 몇 주가 된 것처럼 가물가물한 카라마츠의 미소를 이치마츠는 떠올렸다. 카라마츠가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었다면,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계속 미소지을 수 있는 미래를 꿈꾸었다. 그것이 자신의 곁이 아니더라도.
"돈나 오소코, 카라마츠를… 보스 후보에서 빼내어 주세요."
오소코는 손짓했다. 그의 이름이 호명되었던 그 날처럼. 이치마츠는 다가갔다. 고작 책상이, 책상뿐이었는데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평생 넘지 못할 것이라 느꼈다. 오소코는 턱을 괴고서 그를 훑었다. 선홍빛 시선이 그에게 박힌다.
"내가 왜 그래야 할까, 이치맛쨩?"
"이쯤 되면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카라마츠는…. 그 자식은 보스가 될 만한 그릇이 안 돼요."
"네 가족에 대한 신뢰가 너무 적은 거 아니니~? 뭐, 그렇다고 치자. 그럼 그 빈자리는 누가 메꿀 거지?"
한 명쯤이야 상관없잖아요. 처음부터 보스가 될 수 없었던 아이 한 명이 빠져봤자, 최종적으로 누가 보스가 될지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차오르는 말을 삼켰다. 이 정도까진 예상했던 절차였다. 그는 숨을 골랐다. 벌써 입안이 썼다.
"제가 할게요."
"처음부터 보스 후보에서 탈락했던 네가, 왜 지금은 될 거로 생각하는 걸까? 이해가 잘되지 않네?"
"전 차기 보스가 될 수 있어요."
될 수 없어요. 그는 외치고 싶었다. 나 따위가 그런 책임을 질 수 있을 리 없잖아. 내 목숨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서 웅크리고 빌빌 기는 내가, 남을 짓밟고 올라갈 수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그는 그래야 했다. 적어도, 그러는 척을 해야 했다.
"결국, 차기 보스가 된다는 건, 다른 보스 후보들을 다 죽이면 되는 거잖아요. 지금도 사라지는 애들이 수두룩해요. 정말 모를 거로 생각하신 겁니까?"
"역시 똑똑하다니까, 이치맛쨩은. 그래서 마음에 들었어~. 그런 패기가 있을 줄도 몰랐는데 말이야."
오소코가 손을 뻗고 그의 뺨을 틀어쥐었다. 무언가를 찾듯이, 그의 눈 안을 들여다보고 헤집는다.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놓았다.
"좋아, 그렇게 해줄게. 네 말이 맞았어, 애초에 카라마츠는 보스가 될 수 없었을 거거든~. 뭐, 재능은 제일 출중했지만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애가 워낙 좋아서 말이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패기롭게 제안을 하긴 하였지만, 이 여인이 흔쾌히 승낙해줄 거라 확신하지 못했었다. 의외로 쉽게 승낙해주니 오히려 떨떠름했다. 그를 자세히 관찰하던 오소코가 그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슬쩍 눈치를 보며 의자를 끌어와 등받이에 몸을 기댄 후에야, 이치마츠는 자신의 다리가 얼마나 후들거리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속도 꾸르륵거리는 게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나가기엔 또 무안해서, 그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굴을 보니까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데, 직접 찾아온 성의를 봐서 몇 개 말해줄게. 첫째, 이치맛쨩, 난 차기 보스 후보를 고를 때 아이의 눈을 봐. 일단 눈을 보면 보이거든. 애 싹수가 노란 건지, 아니면 할만한지 말이야~. 난 혼탁한 눈을 좋아해. 어떻게든 살고 싶단 의지랑 죽을 각오가 섞여서 흐린 눈을 가져야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더라고. 살고 싶기만 하면 이기적인 겁쟁이가 되고, 죽을 생각만 하면 비겁한 겁쟁이가 되거든."
"아…. 그럼…."
"맞아. 처음 봤을 때 네 눈엔 그런 낌새가 없었어~. 그냥 살고 싶단 느낌? 카라마츠 그 아이도 그런 눈은 없었지. 그래도 걔는 말이야, 달랐거든. 재밌을 것 같아서, 그래서 보스 후보로 넣었어."
"어떻게 달랐는데요…?"
오소코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 각도를 따라 머리카락이 무겁게 흐트러지며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궁금해? 웃고 있는 입술이 물어봤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걔는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이서 살겠다는 눈이었거든. 둘이 아니면 의미 없다는 눈 말이야. 죽음 따위는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그녀는 도로 몸을 의자에 기댔다. 어느새 다시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로 돌아와 있는 그녀는, 양손을 배 위에 올려두고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아이에게 동화를 읊어주는 할머니처럼, 그녀는 나긋나긋 말을 이어나갔다.
"둘째, 네가 카라마츠를 부추겨서 도망치게 한 것도 이미 알고 있거든. 카라마츠 자리와 바꿔 달라니 뭐니, 이것도 다 시간 끌기지?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연기이고 말이야."
숨이 목구멍에 탁,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손바닥에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이 기분 나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근육이 돌로 변해버린 것처럼 관절 하나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만 귓가에 울려 퍼진다.
"하지만 상관없단다. 그 대신 훨씬 더 가능성 있는 네가 보스 후보로 들어왔잖아~. 나 그렇게 빡빡한 사람 아니니까 말이지. 내가 무슨 말 하는 건지 알지, 이치마츠?"
눈꼬리가 휘어지자 그사이에 주름이 접혔다. 주름으로 셀 수 없는 나이가 그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뻔뻔한 여우 같다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곧 간을 잡아먹힐 희생양이었고.
"카라마츠가 그 깜찍한 삶을 영위하길 바란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차기 보스 자리를 잡아내렴."
말했잖니. 난 네가 마음에 들었다고. 난 이왕이면 너를 나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지만 널 편애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니? 작은 동기부여란다. 최선을 다해서 발버둥 치렴. 이치마츠의 발밑이 무너진다. 그의 영혼은 아래, 아래, 아래로 추락한다. 하지만 괜찮아, 이치마츠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이걸로 카라마츠는 행복할 테니까.
이치마츠는 많은 것들을 잊었다.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한참 동안 손을 울리던 감각도, 자신의 옆이 외로워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던 밤들도, 저보다 강한 대상이 너무나도 쉽게 스러질 때의 쾌감도. 이치마츠에겐 많은 것들이 흐릿해졌다. 내가 왜 이 사람을 죽였더라? 그래, 방해되어서. 난 다음 보스가 되어야 하는데, 짜증 나게 내 길을 막아서. 나는 왜 보스가 되어야 했더라. 이유를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너무 귀찮았다. 그는 제일 강해야 했다. 그렇기 위해 조금 제멋대로 구는 건 괜찮았다. 누군가가 그리 말해 주었다.
하지만 또, 그는 가끔 카라마츠를 생각했다. 어딘가 그들이 꿈꾸던 평범한 미래를 살아갈 카라마츠를. 이치마츠가 그리 좋아했던 미소를 입가에 띠고서 살아갈 카라마츠를. 가끔은 길 잃은 원망이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이리 피에 절어져서 밤잠을 헤치며 사는데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하게 잘 살겠지. 먼저 가, 나도 따라갈게. 어떻게든 날 혼자 남기지 않으려는 너를 밀어내기 위해 내뱉었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고서. 넌 아직도 날 기다릴까, 날 잊었을까. 그런 건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그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자신의 모든 고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다. 믿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겪는 고역은 텅 빈 껍데기가 되어 바깥부터 무너지리라. 그는 세뇌하듯 속삭였다. 카라마츠만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나는 괜찮아.
마침내 마지막 보스 후보를 죽이고 그가 유일이 되었을 때, 오소코는 훌쩍 자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착하네, 정말 그때 약속을 지켰구나. 이래서 내가 아이들만을 후보로 뽑는 거야. 어른들은 너무나도 욕심이 많고, 영악하며, 거짓말쟁이들뿐이거든. 하지만 아이들은 맹목적이며, 어른들보다 기약 없는 미래를 잘 기다렸다. 내가 은퇴할 때가 되면 네가 보스가 되겠구나,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너에게 선물을 하나 줄게.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이제는 사람을 죽이는 게 끔찍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짓밟는 행위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하였다. 삶은 간단명료했다. 그는 예전보다 더 드물게 카라마츠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지니는 무게는 더욱 이치마츠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네 행복을 위해서, 네 일상을 위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어. 넌 지금의 내가 현재에 다다른 이유고 날 버티게 해주는 나의 빛이야. 네가 없다면 나도 없었겠지. 카라마츠, 나의 카라마츠. 널 위해서 나를 버렸어. 인에 따위는 땅바닥에 던지고서 그것의 발버둥에 박장대소하고 걷어찼다. 동정, 사랑, 배려,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모든 걸 비웃고 멸시했다. 카라마츠는 자신이 될 수 없었을 터이다.
오소코는 그가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넌 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야. 그녀는 은퇴하며 그에게 일렀다. 내가 너에게 선물을 준다고 했었지. 자, 들어오렴.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박수를 짝짝, 치자 둘만이 있던 방의 문이 열렸다. 문을 통해 푸른 셔츠를 입은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과 건강한 굴곡들을 지닌 남자는 감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었다. 광이 나는 가죽구두를 신은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는 입가에는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이치마츠의 눈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는 저 남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살아 올랐더라도, 키가 커졌더라도, 이치마츠가 저 남자를 알아보지 못할 날은 없을 것이다.
"오랜만이지, 이치마츠? 이 몸이 보고 싶진 않았나? 이제부터 이 몸이 네 오른손으로서, 너의 미래를 보좌할 거라고! 기대되지 않나!"
"너…. 네가, 왜…."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이치마츠는 울부짖었다. 빌어먹을, 내가 널, 이 지옥에서 꺼내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네가 죽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내가 죽기를 선택했는데. 내가 누리지 못할 일상을, 네가 꿈꾸던 그 일상을 살아가는 널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는데. 이건 기만이고 배반이었다. 이건 조롱이며 고문이었다. 네가 결국 여기로 돌아올 거였다면 나는 뭣 하러 그 많은 삶을 죽였지? 이렇게 아등바등 버틸 이유가 있었던가. 내가 원했던 것들은 결국 너로 인해 무너졌고, 나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는데. 카라마츠가 무어라 열심히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오소코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쟤, 자기가 자진해서 돌아온 거야. 나는 내 약속을 지키려 했다구?
눈앞이 빨갛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몇 년동안, 이치마츠가 피 묻은 손으로 세운 우상이 산산조각이 났다.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는 늦었고 후회하기엔 허무하였으나 인제 와서 찾을 가치도 없었다. 이치마츠는 살인자였고 끔찍한 괴물이었다. 그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릴 구원자는 스스로의 목을 치고 그 피를 제물로써 발 앞에 바친다. 이치마츠는 제 안에서 사랑하던 카라마츠가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사랑의 형상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건 허울 좋은 핑계였을 뿐이다. 애초에 그가 카라마츠를 사랑한 적이 있기나 했던가? 어쩌면 그가 좇은 건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자신이 아니었던가? 모든 게 엉망이었다. 뒤죽박죽으로 섞인 감정은 그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더는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 녀석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어. 그 녀석을 날 쫓아다녔고, 난 무시했지.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 볼 때마다 내가 무엇을 위해 내 목숨을 걸고서 그 전쟁터에 뛰어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 자체를 부정당하는 기분이었거든."
이치마츠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카라마츠와 닮았지만, 그와는 본질에서 다른 남자. 그 안에 몰이해를 읽었다.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을 읽었다. 이치마츠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몰이해도, 혼란스러움도, 두려움도. 모두 조직에 몸담지 않았기에, 평범한 일반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었다. 이치마츠는 그런 평범함을 사랑했다. 카라마츠에게 줄 수 없었던, 주고 싶었던, 그가 져버린 그 모든 요소를 그는 자신의 심장을 바쳐 갈구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요. 카라마츠 씨도, 분명 돌아와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는 당신을 사랑했잖아요. 제가,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지만…. 대화라도 해보았더라면…."
"대화해서 달라지는 게 뭐지, gattina? 그가 다시 조직을 나가 일반인으로 돌아갔을까? 내가 저지른 모든 죄가 없는 일이 되었을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 거야. 내가 사랑했던 카라마츠는 이미 사라졌고, 난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지. 내가 이렇게 졸렬하고 비겁한 인간이야. 내 무시는 내가 카라마츠에게 주는 일종의 벌이었어. 날 기만한 것에 대한, 나에게 돌아온 것에 대한."
카라마츠를 끔찍하게 증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 시절에 매달려 그를 놓지 못한 이치마츠의 어리석음이었다. 그를 볼 때마다 고통스러웠으면서도 그를 멀리하지 못한 이치마츠의 미련스러움이었다. 벌을 내린다느니 뭐니 지껄이면서 여전히 꿈을 꾸고 싶었던 이치마츠의 이기심이다. 문득 밀려 들어오는 피곤함에 이치마츠는 손끝으로 눈 아래를 꾹꾹 눌렀다. 이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남아 있는 고해성사가 있었다. 그가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용서를 빌어야 할 죄가 있었다. 감히 마츠노를 사랑한 죄, 그를 마음에 품은 죄.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한 건 카라마츠 뿐만이 아니었던지라.
"그래도… 그럭저럭 살았어. 그러다가 아카츠카 조직과 동맹을 맺기 위해 일본으로 출장을 오게 되었고, 우연히 당신을 보게 되었지. 당신은…. 당신은, 내가 카라마츠에게 주고 싶던 모든 것이었어.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 꿈이 이뤄진 것 같았어. 내가 저질렀던 모든 죄에 명분이 생기는 기분이었어."
너와 함께라면 다 괜찮다고 느껴졌어. 행복하다고까지 느꼈을지 몰라. 한때 내가 카라마츠와 꿈꾸었던 미래가 그려졌어. 난 너를 이용해서, 감히 너와 사랑에 빠지고, 나의 제멋대로인 연극에 참여시킨 거야. 이치마츠는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는 울면 안 되었다. 마츠노에게 죄책감을 심을 만한 그 어떤 호소도 하면 아니 되었다. 죄인에겐 웃을 권리도, 울 권리도, 살 권리도 없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했어."
애초부터 이건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다시 게워내고 그 속에서 부유하며 스스로를 속인 것에 불과했노라 비난해도 그는 겸허히 받아들이리라.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그의 턱을 쓸다가, 이내 뺨을 감싼다. 거친 촉감의 엄지가 얼굴을 촉촉히 적시는 물기를 닦아냈다. 어느새 흘러넘쳐 흐르던 눈물이 마츠노의 손바닥에 축축히 묻어났다. 이치마츠는 눈을 멀뚱히 깜박이다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조차 당신은 나에게 상냥하구나.
"이제 정말 나에게 진절머리나지 않아? 경멸당해도 싸지. 이런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날 계속 사랑해달라 말할 수 있겠어. 이렇게 많은 죄를 짊어진 내가…."
"맞아요. 저는 돈과 함께해드릴 수 없어요."
속삭이듯 부드러운 마츠노의 목소리에는 진한 피로감이 묻어나왔다. 그럴 만도 하지. 오늘은 정말 긴 밤이었다. 총성을 들은 모두에게 말이다. 마츠노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나갔다. 그 속에는 섞인 안도감을 이치마츠는 감지했다. 오랜 시간 갇혀 있던 꿈에서 드디어 벗어나는 자의 행복이었다.
"그건 당신을 사랑했던 카라마츠 씨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없고, 돈과 저를 위해서도 그럴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전부터, 설사 제가 돈이 좋다고 고백했더라도…. 저희는 안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당신의 사랑을 의심했던 게 아닙니다. 마츠노는 아이를 달래듯 이치마츠를 달랬다. 우리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에요. 그건 당신도 알고 있었고, 나도 알고 있었죠. 우리는 서로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우리는 서로에게서 우리가 원했던 환상만을 좇다가 지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겠죠. 우리가 사랑했다면 그 사랑이 틀린 것이라곤 말할 수 없겠지만, 서로를 더욱 버겁게 만드는 짐이 되었을 거예요. 마츠노는 숨을 골랐다. 손을 거두고, 이내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았다.
"돈과 함께했던 지난 한 달이 즐겁지 않았다고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기분은 정말 기뻤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디…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머리에 쓴 모자를 조금 더 앞으로 기울여 눌렀다. 미처 닦이지 않은 눈물이 얼굴에 달라붙어 텁텁한 느낌을 남겼다. 카라마츠, 이게 네가 원하던 결말이었을까. 기계적으로 그는 이별을 고했다. 푹 쉬어, gattina. 안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다시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쓰는 말이었다. 문이 그의 뒤로 쿵, 닫힌다. 그는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쫓아오는 목소리를 기다렸다. 곧이어 이어지는 적막에, 그는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곁에는 지독한 외로움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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